자아실현이란 개인이 지니고 있는 소질과 역량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고 계발하여 자기가 목적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실현할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을 실천하려는 욕구가 있으나, 그 욕구의 우선순위는 낮다. 왜냐하면 자아실현 욕구는 생존을 위해서나 현실적으로 필요한 욕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자아실현 욕구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자아실현 욕구는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자아실현 욕구에 좌절된 개인은 그의 본질에서 이탈한 병적인 상태에 머물 가능성이 많다. 자아실현은 가장 건강한 사람의 실상이다.
자아실현을 위해 의지가 중요하다
자아를 실현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이다. 의지란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 잠자고 있는 에너지, 재능, 활력을 일깨워 목표를 향해 돌진하도록 하는 힘이 의지이다. 의지의 힘은 내부로부터 넘쳐 나온다. 아무리 좋은 인생관과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의지가 없으면, 그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권명안 저,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한다」(서울: 박우사, 2002) p.71>
그렇다면 우리는 자아실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자아실현은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본성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본성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인격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품격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부른다. 인격은 그 사람의 인간성이다. 인간성은 그 사람의 사고, 행동, 감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매력 있는 인간성을 가진 사람은 먼저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길러야 하며, 다음으로 이 생각과 사상에 따라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하며, 또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을 고양시켜야 한다. 여기서 행동이란 걸음걸이, 말씨, 앉음새, 이야기 듣는 자세, 사물을 보는 태도, 옷차림, 몸가짐, 표정 등 모두를 포함하고, 감정은 표정이나 행동에 나타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포함한다. 이 행동과 감정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어떤 사람의 인격은 이 행동과 감정에 의해 평가된다.
나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차원에서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마음을 관리하는 것으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게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 둘째는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셋째는 열정을 갖는 것으로, 흥미와 관심으로 의지를 잃지 않고 계속 열정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자기의 본성을 함양하여 자아를 실현시키고 인격을 높일 수 있다.
1 마음을 관리하자
먼저 마음을 관리하는 것이다. 마음은 사람의 신체를 주재한다.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쌓여 있으면, 긍정적인 일도 할 수 없고, 행복한 삶도 살 수 없다. 마음을 관리한다고 하는 것은 부정적 감정을 관리하고,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다. 감정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람은 감정으로 느낀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무엇을 하고 싶다, 하기 싫다, 두렵다, 편안하다 등등. 이러한 감정들은 인간적 특징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인드라닐 고시 저, 황옥순 역 「인도인들의 행복 처방전 10」(서울: 열음사, 2008)>
부정적 감정을 관리하자
부정적 감정에 대해 먼저 생각하여 보자. 자신의 의지를 방해하는 부정적 감정으로는 자기 연민이나 분노와 같은 것이 있다. 이들은 방심하고 있으면 곧 사람 마음 가운데에 뿌리를 내려, 마음을 동요시키기 시작한다. <권명안 저,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한다」(서울: 박우사, 2002) pp.88-89>
먼저 자기 연민이다. 자기 연민이란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오 불쌍한 것,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고통을 당하다니’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자신을 불쌍하게 느끼고 슬프게 느끼고 안타깝게 느낀다. 자기 연민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과거에 받지 못한 위로를 나 자신에게 해줌으로써 공감 욕구를 채우고 공격성도 완화시킨다.
하지만 자기 연민에 심하게 빠질 경우 모든 에너지를 자신에게만 쏟는다. 이에 따라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되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받은 상처 때문에 지금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어. 난 외롭고 너무 불쌍한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상태를 합리화하여, 상처 받은 아이로서 끊임없는 사랑을 갈구한다. 따라서 자기 연민이 심해지면 열등감에 빠지기도 쉽고 사회생활을 하기도 어려워진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위로해 줄 대상을 찾아 헤맨다. 남이 자기를 이해해주길 바라고, 공감해주길 바라고,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이는 유아적 습성으로 세상을 겉돌게 만든다. 그리고 심각한 감정의 폭풍우를 겪기도 한다.
다음은 분노이다. 분노 또는 화라고 하는 것은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격분, 적개심, 폭력 행사, 말없이 노려보기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분노의 문제는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골치가 아프거나 짜증이 나는 것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의 핵심은 통제 가 불가능한 것이다. 대개 분노는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기 때문에, 마음속에 쌓인 억울함이나 답답함을 밖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분노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있는 정신적 보상은 없다고 한다. 분노가 옴짝달싹 못하게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대로 맥을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가 일어나면, 생리학적으로 고혈압, 궤양, 발진, 심계항진, 불면증, 피로, 심지어는 심장병을 일어나게 하고, 정신적으로는 사랑하는 관계에 금을 가게 하거나 대화를 단절시키며, 죄책감이나 우울증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분노는 다른 사람을 변하 시키지도 못한다. 분노하면 논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 상대가 분노하고 있는 사람을 통제하고 이용하려고 하면, 분노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로서 분노를 돋우는 사람은 겁먹은 듯 행동할지 모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상대를 분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분노하는 사람이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는 사실상 상대방의 손에 넘겨져 그 안에서 보복적으로 행사된다. /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p.261-265>
자기 연민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은 누구에게나 생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이런 이치가 변할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부정적 감정에 대처해야 한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먼저 부정적 감정이 생겨나는 원인에 대한 이해이다. 부정적 감정은 대부분 유치한 태도로 대응하기 때문에 생긴다. 부정적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일종의 선택이고 버릇이다.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원인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해를 구하는 데 집착한다면, 자신의 부정적 감정은 계속 강화되고 습관화된다. <John. A. Schindler 저, 서현봉 편역, 「감정 클리닉」(서울: 박은사, 2001> pp.35 /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p.261>
다음으로 부정적 감정에 동요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범하게 행동해야 한다. 부정적 감정에 유치하게 대응하지 않기 위해서다. 부정적 감정을 피하지 말고, 당당히 바라보면서, 해결해야 한다. 꼭 분노해야겠거든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단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화를 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긍정할 때 부정적 감정의 격류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John. A. Schindler 저, 서현봉 편역, 「감정 클리닉」(서울: 박은사, 2001> p.35 /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p.261-263>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자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방법으로는 확신, 믿음, 감사 등이 있다. <행복은 사회적 지위나 부가 아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부정적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적 감정도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두려움, 슬픔, 불안, 분노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이를 해결하려는 안정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 삶에 대한 믿음과 확신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강미경 역, 리처드 칼슨 저,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서울: 창작시대, 2000) pp.160-161> /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5>
먼저 믿음과 확신이다. 행복은 확신이라는 믿음을 가진 태도이면서 동시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생이 펼치는 모든 것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자신 있는 자세이다. <믿음이나 확신의 태도가 있을 때, 우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현재의 순간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 손 크리스토퍼 셰어 저, 이순희 역,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서울: 프라임, 2006) p.168> 우리가 처한 상황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있고, 우리의 문제에는 끊임없는 해결책이 있다. 문제는 이것을 믿고 확신하느냐 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상당 부분은 믿음에 달려 있다. 행복도 나 자신을 믿느냐에 달려있다. 소냐 류보머스키에 의하면 자신이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도 자신의 결심을 유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고 한다. 그런 믿음 자체가 스스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손 크리스토퍼 셰어 저, 이순희 역,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서울: 프라임, 2006) p.228/ 소냐 류보머스키 저, 오혜경 역,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서울: 지식노마드, 2008) p.139>
다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는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감사의 표현은 이해이며, 경이이다. 또 좌절 속에서 밝은 것을 바라보게 한다. 감사를 하면, 받은 축복을 헤아려 보고, 음미하게 한다. 로버트 에몬스는 감사의 정의를 “삶을 향해 일어나는 경이, 고마움, 이해의 느낌”이라고 한다. 자신의 여건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사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나쁠 수도 있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감사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감사의 실천은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오늘 주어진 삶을 그대로 인정하며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삶에 이르게 되었는지 통찰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소냐 류보머스키 저, 오혜경 역,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서울: 지식노마드, 2008) p.186>
독일 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평화의 기도문에는 “하나님 내게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손 크리스토퍼 셰어 저, 이순희 역,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서울: 프라임, 2006) pp.384 / 소냐 류보머스키 저, 오혜경 역,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서울: 지식노마드, 2008) pp.90> 나는 이 기도문이 마음의 안정을 구하는데 아주 좋은 기도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분노, 자기 연민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없애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또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내 마음속에는 자연히 믿음과 확신이 생길 것이며, 또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때 나는 그 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2 삶의 목표를 설정하자
자아실현을 위해 두 번째 하여야 할 일은 나아가는 방향을 정하는 것, 즉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자
목표 설정은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목표 설정은 말로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말은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개념과 말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구상하고 창조한다. 목표 설정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달한다. <스코틀랜드의 산악인 윌리엄 H. 머리는 「스코틀랜드인의 히말라야 원정기」에서 “시작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후퇴할 가능성이 있으며, 망설이면서 우물쭈물하게 된다. 모든 시작과 창조 행위에는 하나의 기본적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선언하는 순간 신의 섭리 또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괴테의 시에도 “뭔가를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다고 꿈을 꾼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용기 안에는 비범함, 기적, 힘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믿음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자기 달성적인 예언이다. /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p.124-126> 뿐만 아니라 목표를 설정하면 현재 이 순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목적지가 없다면 우리는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끊임없이 망설이고, 걱정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현재에 충실하여 지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고, 길가에 핀 꽃이나 경치를 감상하면서 지금 하는 일을 즐길 수 있다. 목표를 설정하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익이 있다.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p.130-131>
첫째는, 목표를 설정하면 자신의 소명의식을 갖는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정열에 부합하는 목적을 설정했을 때, 소명을 느낀다. 사람은 추구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사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추구 과정 속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이를 실천할 수 있다.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p.81-82>
둘째는, 목표를 설정하면 용기와 인내를 갖는다. 아주 극한적 어려움 속에 있더라도,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을 인내하고 삶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가혹한 삶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한다. 그들은 강제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었지만, 삶에 대한 목적의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하는 가족과 다시 만나거나, 언젠가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쓰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또한 고통을 인내하였다고 한다.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87>
셋째는, 목표를 설정하면 또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목표를 설정한 것은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이 정해지면,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앞으로 필요한 능력을 쌓아 간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람의 본능에 따른 결과이다. 예로서 여러 사람이 길을 가는 데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분명히 이름 부르는 방향을 바라볼 것이다. 다른 사람은 보지 않는다. 왜 그를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관계되는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갖는 곳에 끌리게 된다. 그 결과 그와 관련되는 정보와 지식도 많이 얻게 되고, 거기에 필요한 능력도 자연스럽게 쌓아간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또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행복은 우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충분히 구현함으로써 가능해진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열정을 느끼고,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하여하고 있다고 느끼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목적의식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열정을 통한 능력의 발휘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한다.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85>
넷째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목적의식은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까지 관심을 갖게 한다. 인간 삶의 목적은 과학적이고 증명 가능한 것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와 철학, 도덕도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중용이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는 삶은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로 절대적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 공자께서 지나치거나 부족한 것이 모두 옳지 않다고 경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고, 그 결과 과학은 현시대의 종교가 되었다. 행복과 영성이 중요성의 순위에서 밀려났다. 과학은 그 자체로 우리의 모든 문제, 즉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답을 다 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에 목적의식을 가질 때, 과학혁명으로 현대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간 것들, 즉 비물질적이고 측정할 수 없는 것들도 관심의 대상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극단에서 중용으로 돌아오게 한다. <탈 벤 샤하르 저, 노혜숙 역, 「하버드대 행복한 강의 해피어」(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7) pp.277-278>
바람직한 목표
행복한 삶을 위해 목표를 정해야 한다면 바람직한 목표는 어떤 것일까?
먼저 바람직한 목표는 자기 일치적이고 본질적이어야 한다. 본질적 목표는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심리적 욕구를 직접적으로 만족시켜준다. 여기서 심리적 욕구란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 나를 둘러싼 세상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신감에 대한 욕구,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족하는 대인관계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얻는다. 이러한 본질적인 목표는 그것이 본래 만족스럽고 의미가 있어서 자신을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정서적으로도 성숙하고 공동체에도 공헌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본질적 목표는 자기 일치적 목표이다. <소냐 류보머스키 저, 오혜경 역,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서울: 지식노마드, 2008) pp.128-129> 자기 일치적 목표는 개인적인 관심과 확신을 갖고 추구하는 목표이다. 자기 일치적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부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어야 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 일치적 목표는 자기가 하고 싶고 원하는 것과 일치한다. 자기가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은 자신의 적성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성은 무엇인가? 적성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이나 성격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적성이 학문과 관련된 것인지, 회사의 조직원이 되는 것인지, 창업에 관련된 것인지 등과 같이 무엇인지 모른다. 적성은 구체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적성검사를 해도 구체적이고 확실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두루뭉술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자아성찰을 통해 적성을 찾아야 한다. 성찰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자기의 적성에 근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기 적성은 아니다. 자기 적성에 맞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천을 통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관한 정보나 자료를 읽고 그와 관계되는 일을 할 때 실증을 느끼지 않고 재미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고, 또 다른 분야에 비해서 높은 성취 수준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그것은 자신의 적성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만약 그 반대일 때는 그것은 자신의 적성이 아니다. 따라서 같은 방법으로 다른 적성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자기 적성을 찾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소냐 류보머스키는 목표를 찾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자신이 죽은 후 남기고 싶은 개인적 유산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그 후 글로 적어보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은 자신의 삶, 가치관, 성취를 요약해 적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지 써보는 것이다. / 소냐 류보머스키 저, 오혜경 역,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서울: 지식노마드, 2008) pp.132-140>
다음으로 바람직한 목표는 조화로워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가 개인의 행복을 간섭하더라도 사회를 파괴할 수 없다. 사회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목표는 서로 보완적이고 조화로워야 한다.
특히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해 환경에 대한 융통성이 높다. 환경이 변화하면 목표도 변화해야 한다. 사회의 기대도 외면할 수 없다. 예로서 국가, 민족, 종교와 같은 우리의 문화는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 개인들이 어떤 사회적 역할과 과제들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정체성과 자아의식 확립, 학업 수료, 결혼, 집 장만, 직장에서의 성공, 아기를 갖는 것, 은퇴 등은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들이다. <소냐 류보머스키 저, 오혜경 역,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서울: 지식노마드, 2008) pp.128-129>
사회와의 조화 문제에서 도덕성이 제기된다. 도덕이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을 말한다. 도덕을 통해 사람은 공동생활에서의 사람의 행위 기준, 즉 선악, 정의, 불의 등을 제시한다. 도덕성이란 도덕 현상을 인식하고 도덕규범을 준수하려는 마음이다. <이 도덕성은 사람의 행복과 관련된다. 2009년 EBS에서 다큐프라임 사람 탐구 대기획 5부작 가운데 제2부 도덕성을 실험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도덕성은 아이의 거의 모든 행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도덕적이고 너무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말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도덕성이 높으면 아이의 경쟁력도 높았다. 도덕성은 변수의 연속이며 환경, 상황, 관계에 따라 끈임 없는 도전을 받고 적응하였다. /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 - 제2부 도덕성 / 작성자 미씨김 2009.06.25.>
설정된 목표가 본질적이고 사회와의 조화가 이뤄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목표가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삶의 현실은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것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직하게 설정된 목표가 성공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손 크리스토퍼 셰어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조건은 뚜렷하고 간결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목표를 뚜렷이 정하지 않고 출발하면 행복으로 위장된 여러 감정, 분위기, 생각 때문에 목표에서 빗나갈 위험이 있다.
두 번째 조건은 목표를 추구할 때 어떤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목표는 그것을 실천할 도구가 없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 자본, 조직, 아이디어, 인적 지원 등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신의 현실에 맞는 도구를 선택하는 것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물론 자신의 성격과 장점, 단점 등 자신의 본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조건은 게임의 규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변 환경은 물론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의 규칙에도 구속된다. 행복하기 위해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사회의 규범이나 관습, 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손 크리스토퍼 셰어 저, 이순희 역,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서울: 프라임, 2006) pp.24-25>
3 열정을 갖자
자아실현을 위해 세 번째 하여야 할 일은 흥미와 관심으로 열정을 갖는 것이다.
열정은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원초적으로 열정을 갖고 있다. 사실 모든 동물은 다 열정을 갖고 있다.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은 열정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있다. 모든 생명체의 열정은 관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그들은 보고 듣는 모든 것에 흥미를 느낀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탐구한다. 생활 주변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우연히 손에 넣은 물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사람은 저마다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다르다. 자신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그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재미있는 것이고 열정이다. <버트런드 러셀 저, 이순희 역, 「행복의 정복」(서울: 사회평론, 2008) pp.176 / 184>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좋아하고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매우 현재 지향적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립적이다. 그들은 퉁명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그들은 불합리하고 소소한 규칙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웃는 법, 웃음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앞뒤 맞지 않는 일도 좋아한다. 스스로를 불평 없이 받아들인다. 세상이 꼭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없다. 그들은 호기심이 왕성하다. 그들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행복을 품고 산다.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p.277-285>
성장동기를 부여하자
열정은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어떻게 살겠다고 목표를 정했다면,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동기가 필요하다. 웨인 다이어는 동기에는 부족한 면을 메우고자 하는 미완의 동기와 발전을 위한 성장의 동기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장의 동기이다. 생명의 유일한 증거는 성장이다. 성장 동기는 행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성장 동기가 가슴을 끓일 때, 우리는 삶의 목표를 실천할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슴과 양심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장을 동기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이 인생의 모든 현재의 순간들을 직접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사람은 성장동기를 가지고 새로운 경험에 가슴을 열 때,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자신 안에 내재된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다. 새로운 것에 접할 때, 사람은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권태에 따른 심리적 좌절을 피할 수 있다.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p.38-39 / 149-153>
그렇다면 성장동기를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성장의 동기를 갖기 위해서는 폭넓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주의력이나 흥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 사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람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주변 상황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는 일에만 정신력을 집중한다. 이것은 자기 집착이다.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것은 불안감과 걱정을 만든다. 주변 상황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자극에 민감해지고, 분별력과 균형감각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들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피곤해질수록 외부 일에 관심을 줄인다. 그럴수록 외부적 관심이 제공하는 안도감이 사라져서 점점 더 피곤해진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악순환에 빠져든다. <버트런드 러셀 저, 이순희 역, 「행복의 정복」(서울: 사회평론, 2008) pp.171/237-238/240-241>
다음으로 성장의 동기를 갖기 위해서는 변화와 도전을 즐겨야 한다. 주변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변화와 도전을 즐긴다.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른 동물과 비슷하지만, 변화와 도전을 즐긴다는 것은 다른 동물과 다르다. 다른 동물은 배가 부르고 안전하면 휴식을 취한다. 계절에 따라 대이동을 하는 동물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습되고 반복된 도전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극이나 북극과 같은 극한적 상황을 극복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것도 바로 변화와 도전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리차드 리키, 로저 레윈 공저, 김광억 역,「오리진」(서울: 주우, 1983) pp.77/185>
변화와 도전을 위해서는 완벽한 것만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결과가 불확실한 미지의 분야인 신비와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포럼」지 1930년 10월호에 발표한 “내가 신봉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다. 신비야말로 모든 예술과 과학의 진정한 원천이다.”라고 주장했다.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149> 윈스턴 처칠은 ‘완벽이 아니면 모두 소용없다’라는 격언은 한 단어로 줄이면 ‘무기력’이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완벽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면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다. 완벽은 사람에게 적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신은 완벽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웨인 다이어 저, 오현정 역, 「행복한 이기주의자」(서울: 21세기북스, 2008)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