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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농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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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성섭 Sep 30. 2021

채근담 전편 173장

2021년 09월 29일 수요일이다.    

  

오늘 아내는 서울에 갔다 왔다. 

병원에 계시는 장모님의 면회가 되지 않아, 

가까이서 장모님을 돌보고 있는 처형을 만나기 위해서다. 

수고하는 처형을 위로하고 또 직접 만나 장모님의 근황 등을 들었다. 

장모님을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가까이 왔다는 자체가 마음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아침 9시 30분 기차로 서울에 갔다가, 저녁 5시에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왔다. 

내가 제천역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 왔다.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있으면서 채근담 책을 보았다. 

점심을 먹고 3시경에는 붓글을 썼다. 

채근담 전편 141장에서 174장까지 보았다.      

오늘 읽은 것 가운데 전편 173장을 소개하겠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爲鼠常留飯 憐蛾不點燈 

古人此等念頭 是吾人一點生生之機 

無此便所謂土木形骸而已”     


번역을 하면, 

“쥐를 위해 항상 밥을 남겨두고, 나방을 불상하게 여겨 등불을 켜지 않는다고 한다. 

옛사람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생생의 작용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곧 나무 인형에 불과할 것이다.”     


쥐를 위해 밥을 남겨두고, 나방을 위해 등불을 켜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보통 사람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살아가고 있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쥐나 나방 같은 경우는 

사람이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종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생존해 있는 모두 생명체는 

그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자연의 주재자인는 하늘의 이치를 대행하는 

삼재(三才)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싶다.      

천지자연을 주재하는 하늘의 근본 원리는 무엇일까? 

나는 생생(生生)이라고 생각한다. 

천지자연에 생명체가 없다면 하늘은 그 의미가 없다. 

하늘이 존엄한 것은 천지자연의 생명체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여 

무한한 생명을 존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있기 때문에 하늘은 존엄하다.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여 

이 천지간에 생명력이 왕성하게 활동하게 하는 것에도 근본 원리가 있을 것이다. 

하늘은 특별히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없다. 

무위(無爲)로서 모든 생명체가 활력 넘치게 살아가도록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사랑이다.      

하늘의 사랑은 조화와 균형이다. 

조화와 균형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가 적당하게 그러면서 활기차게 살아가게 한다.      

하늘을 대행하는 삼재로서의 인간이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이미 삼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쥐나 나방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천지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사랑을 인식할 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더욱 빛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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