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를 부탁해

동네책방 책방일기 #07

by 김지선

쉬는 날이 되어서 드디어 출판사에 새로운 책을 계약하기 위해 찾아갔다. 미리 약속한 것이라 시간을 맞춰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출판사는 집에서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심지어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런 곳에 출판사가 있었던가…?


동네여서 자주 오가는 곳인데 엄청나게 큰 대문과 음침한 입구, 그리고 삼엄한 경비가 있을 법한 모습이 낯설었다. 이렇게 특이한 곳을 지나가면서도 몰랐던 것인지 의아했다. 입구는 커다란 철문이 닫혀 있었고 벨을 누르고 들어가야 한다. 벨을 누르려는데 바로 옆에 어떤 문구가 보였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쓰여 있는 문구였다. 분명 약속까지 하고 왔는데 쉬는 날이라니…? 황당했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까 벨을 눌렀다. 한참 후 누군가가 나와서는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담당자 이름을 말하고 계약을 하러 왔다고 했더니, 그 담당자는 이미 퇴사해서 여기 없단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계약을 하기로 하고 찾아왔는데 심지어 약속한 시간에 퇴사까지 하고 없어진다는 건 책임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일이었다. 준비한 계약서와 원고를 손에 든 채로 어이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내 쉬는 날에 대한 휴식의 대가가 ‘쾅’ 문과 함께 닫혔다. 내 키보다도 두 배는 커 보이는 철문이 조금 남아 있던 자존감까지 모조리 앗아갔다.


터덜터덜 근처를 방황했다. 희한하게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어떤 박물관이 보였다. 새로 생긴 것처럼 펄럭이는 깃발들에 광고 문구가 잔뜩 있어서 눈에 띄었다. 그래, 들어가 보자! 박물관에는 우연히도 모 TV 프로그램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옆을 쓱 지나가는데 마침 작가가 인터뷰하자고 제안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내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자리를 잡는데 가지고 있던 음료를 옷에 쏟았다. 하얀색 블라우스가 지저분하게 물들었다. 아무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는 옆에 있던 남색 블라우스를 빌려줄 뿐이다. 그런데 도통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한 구성에 나만 혼자 삐걱대고 있었다. 왜 다들 이리 평온할까.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무너지는가. 왜 이리 모조리 다 엉망일까.


꿈이었다.




우연히 만난 곰인형


책방을 오픈한 지 6개월이 지나는 시점, 조금씩 지쳐갔다. 자유롭던 삶에서 얽매이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적응하기 어려웠다. 누군가를 만나러 다니던 삶에서 누군가가 만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삶에 지쳐갔다. 어떤 사람은 방문하기 쉬운 곳에 자리를 잡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라 말하지만, 목 좋은 곳에 자리했다고 내가 느끼는 지치는 감정들이 없었을까….


점심이 지난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던 삶에서 오전 10시엔 일어나야 하는 일상을 사는 것이 처음엔 힘들었는데 그것도 6개월쯤 지나니 차츰 괜찮아졌다. 하지만 괜찮아질 즈음 다른 문제점들이 슬금슬금 나타났다. 내가 매일 머무는 이 공간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SNS에서 본 커다란 곰인형! 내가 찾던 것이 어쩌면 곰인형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커다란 곰인형을 당장 주문했다.




파리의 어느 책방에서 만난 곰인형


우연히 본 SNS 게시글에는 정말 많은 곰인형들이 건물 곳곳에서 귀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파리의 어느 책방에서 커다란 곰인형을 50개 정도 사서, 책방을 꾸미는 것뿐 아니라 건물 전체 외관을 곰인형으로 도배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나도 파리의 한 책방의 곰인형의 이야기에 동참해서 책방을 곰인형으로 꾸미고 싶었다. 매일매일 하고 싶은 말을 곰인형을 통해 전해도 좋겠다 생각했다. 다양한 모습의 곰인형 사진을 담아 연말에 달력을 만들어도 재밌겠다고도 생각했다.




곰돌이가 필요한 사람들


곰인형은 책방 내부에 있을 때도 있었지만, 테라스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골목 한복판에, 커다란 곰인형이 놓여 있는 가게를 보자, 사람들은 호기심을 보였다. 평소엔 그저 지나가던 사람들이 빼꼼 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중년의 여성분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말했다. 어른이 되어서 잊고 살던 커다란 곰인형을, 우연히 걷던 골목을 지나다 만나니까, 소녀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고맙다며, 울먹거리던 그 중년의 여성분을 잊을 수 없다. 그 여성분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이 곰인형을 좋아했다. 아마도 아이들은 이미 인형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곰인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곰인형을 다락방에 올려놓았을 땐, 사람들이 인형을 포근하게 안았다. 가끔 울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 곰인형이 큰 위로가 된다 했다. 내가 안는 것이지만 나를 안아줄 만큼 커다란 곰인형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었다.


갑작스럽게 책방 문을 닫아야 할 때, 책방 입구에 곰인형을 가져다 놓고 ‘사장님이 나 빼고 어디 갔어요…’라고 붙여 놓은 임시 휴무 안내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문 닫힌 줄 모르고 왔다가 문 닫힌 것 보고 짜증이 나긴 했는데, 곰인형을 보고 피식 웃었다며, 다음에 지나칠 때 꼭 내게 말해줬다.




어른도 곰인형이 필요해


곰돌이는 가면 같았다. 울고 싶을 때 내 얼굴을 감추고 울 수도 있고, 위로가 필요할 때 안길 수 있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말을 걸게 된다. 어른이 되니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데…, 어른이 되니 어릴 땐 많았던 인형이 다시 필요해지는데…, 어서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한 때 어렸던 우리의 어린이 시절을 자꾸 잊고 산다. 어른이 되니 자꾸만 감정을 숨기고만 살게 되는 걸까.




곰돌이를 부탁해


책방에 곰인형을 가져다 놓고, 2019년 연말이 될 즈음 2020년 12달 달력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꾸준하게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쓰고 싶어서 브런치에 ‘곰돌이를 부탁해’라는 매거진으로 몇 개의 글을 썼다. 결국 그 이야기들을 책방 일 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시집으로 엮어 냈다. 위로가 필요한 어른들에게 전하는 엉뚱한 작은 시집은 펼쳐 냈다. 그리고 ‘곰돌이를 부탁해’라는 말은 책방 몇 주년을 기념할 때마다 만들어 낼 책의 제목이 되었다. 두 번째 해는 ‘곰돌이를 부탁해 2’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고(실제로는 '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로 출간), 세 번째 해는 '곰돌이를 부탁해 3'으로 에세이를 썼다(실제로는 '책방에서 행복을 찾는 당신에게'로 출간). 네 번째 해는 '곰돌이를 부탁해 4'로 동화를 썼다(아직 미출간. 가제는 '고민이 있을 때 책방에서 만나자'), 다섯 번째 해는 '곰돌이를 부탁해 5'로 음악 에세이를 쓰고 있다.


같은 '곰돌이'지만 매번 곰돌이의 주체는 달랐다. 어떤 해는 알바생이었고, 어떤 해는 책방 주인이었고, 어떤 해는 곰돌이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곰돌이들이 탄생할까 궁금하면서도 설렌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골목 한편에 자리 잡은 책방에 사는 곰돌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나날을 꿈꾼다.






당신에게도 커다란 곰인형이 필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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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는 사실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하고 내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 쉬고 싶은 마음,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꾀부리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심정이 아닐까. 책방을 찾아온 사람들도 어쩌면 어딘가로부터 도망치고 싶거나 빈둥거리고 싶거나 숨어 있고 싶은 사람이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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