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책방일기 #08
빨리 설거지하고 싶다고 부지런히 움직이다가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에스프레소 샷 잔을 깨뜨렸다. 고작 엄지와 검지로 만드는 동그란 원만큼 작은 잔인데 파편이 꽤 넓게 퍼졌다. 앞치마까지도 파편이 튀었다. 앞치마를 하지 않았다면 내 옷에도 파편이 튀었을 것이다. 순간 멈칫. 치우고 싶지 않았다. 뭔가 서러웠다. 쉽게 구하지 못하는 고가의 물건도 아니고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고 화장실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와 부지런히 쓸었다. 와장창 깨졌던 파편들을 처음 바라봤을 땐 청소 범위가 상당히 넓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쓰레받기로 치우다 보니 파편이 넓게 퍼지진 않았다. 빗자루질 몇 번으로 청소가 간단했다. 늘 그랬다. 어떤 일이든 나쁜 일은 처음 닥치는 순간이 막막하고 그걸 해결하면서는 오히려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긴다. 유리 파편쯤이아 치우면 그만인 것을…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청소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의 저주가 누군가에 닿아 그 사람을 상처 낼 수도 있는 법이니 파편이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작은 비닐에 모아 넣고 테이프로 꼼꼼하게 말았다.
안 써도 되는 신경을 써서 그런지 갑자기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가 다 되어갔다.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뱃고동 소리를 듣고야 겨우 알았다.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무엇을 하느라 정신없어 밥 먹는 것조차 까먹고 있었을까. 남편이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반찬으로 김치찌개와 멸치볶음, 시금치 무침, 그리고 김이 있었다. 김을 빼면 어제저녁으로 먹은 밥과 똑같았다. 식비를 줄이기 위해서 매일 친정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남은 반찬들을 싸와 다음날 점심식사가 되었다. 밥과 반찬이 있어도 챙겨 먹지 못할 만큼 바쁜 하루를 보내는 나를 위해 남편은 매일 아침 도시락을 챙겨 준다. 밥을 따뜻하게 먹어야 한다고 보온 도시락으로 정성스럽게 싸준다. 그래서 몇 시간 후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서 점심식사 정도는 가볍게 포기할 법한 오후 4시에도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좁은 책방에 김치찌개 냄새로 가득 차기 전에 서둘러 빠르게 밥을 먹고, 얼른 설거지통에 밀어 넣은 후, 이를 닦고 립스틱을 재빠르게 발랐다. 이 중간에 어떠한 손님이 오질 않길 바라며… 서둘렀다. 설거지를 끝낸 후 무심코 앞치마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딱딱한 물체가 만져진다. 순간 무엇인지 단번에 알았다. 날카로웠으며, 불규칙한 것.
손을 더 깊숙하게 집어넣어 볼까? 얼마나 날카로운지, 손을 다칠 수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 보자. 손을 더 깊이 그래 더 깊이. 짜릿한 붉은 핏방울이 솟아 앞치마 주머니를 완전히 적시고서야 멈추게 되는 그런 순간까지….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내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처음 만난 손님은 내 모습을 보며 경직된 표정으로 뒷걸음치며 나간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오늘 하루는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다.
혼자 일하는 건 자신 없어서
책방을 운영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난 후,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 두려웠다. 20년 전 화장품 가게에서 일 년 가까이 일하면서 점원으로 일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땐 혼자가 아니었다. 사장님이 있었고, 사모님도 있었고, 같이 일하는 언니들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들만 하면 되었으니 어렵진 않았다. 그래서 책방을 운영하면 함께 일할 직원(까진 무리일 테니 알바)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자주 만나던 동생이 있었는데, 지나가는 말로 ‘알바 필요하면 책방으로 와!’라고 했더니 정말로 돈이 필요하다며 일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그는 그렇게 책방지기 2.5호가 되었다. (종종 일을 도와주던 남편을 1.5호라고 했더니 자기도 .5가 맘에 든다며 2.5가 되고 싶다고 했다)
피곤하니까 쉬어간다는 알바생
기본적인 업무를 맡기는 것 외에 잡다하고 머리를 써야 하는 일, 복잡한 것들은 여전히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에 실질적으로 책방지기 2.5호는 책방에서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책방 겸 카페로 영업을 하면서, 책방이 최대한 오픈 시간 내에 문이 열려 있을 수 있도록 책방을 잘 지켜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업무였다.
가게를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만들고, 책장 정리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책방지기 2.5호에게 너무 기대지 않도록 정말 기본적인 것만 잘해주길 바랐다. 언제나 그만두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책방지기 2.5호에게 딱 1년 정도만 도와달라고 했다. 책방지기 2.5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는 골목 한편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매번 책방지기 2.5호가 신선한 사건들을 만들어서,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책방지기 2.5호는 책방에 도착하면, 내가 정리해 놓은 업무 지시 사항을 살펴보고는 곧장 휴식을 취했다. 한 번은 다락방에서 잠이 들면 아래층에 누가 오면 모를 때가 많다고 유리문에 풍경을 달아달라고 요청했다. 그 말에 난 당장 다이소로 달려가 풍경을 사다가 달았다. 책방에서 일을 하긴 하지만,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건 참 좋은 일인 것 같아, 책방지기 2.5호가 손님이 없을 때 잠을 자거나, 쉬거나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가게의 사장님들이 느끼겠지만, 알바생들은 사장이 젤 바쁘고 아플 때 함께 바쁘고 함께 아프다는 거였다. 오픈 초반, 아직 책방에 대한 것을 잘 몰라 우왕좌왕하던 때, 정말 바쁘던 그 시절 알바생이 갑자기 신종플루에 걸려서 2주 격리가 되었다. 격리 대상이라니…. 뭐 덕분에 내가 더 열심히 일했다.
귀차니즘이 센스와 창의력으로 발휘되는 책방지기 2.5호
다른 건 몰라도 책방지기 2.5호가 책방에 도착하면 꼭 해야 하는 업무는 책방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하는 오픈 개시 사진이었다. 책방지기 2.5호는 그걸 가장 힘들어하고 하고 싶지 않다며 맨날 투덜거렸다. 코딱지만 한 가게에서 맨날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어 보내야 하냐며, 하루에 10장씩 찍어서 10일 동안 쓰면 되는 것 아니냐고 투덜거렸다. 난 투덜거리는 것이 괜히 귀엽게 느껴져서 쓸데없는 사진도 마구 부탁했다. 예를 들면, 온라인 스토어에 올릴 상품 사진 같은 것.
책방의 굿즈로 에코백을 처음 만들었을 때였다. 에코백을 온라인으로도 판매하고 싶어서, 내가 없을 때 할 일 없을 책방지기 2.5호에게 젊은 감성을 담아 에코백 사진을 담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고 싶지 않다던 책방지기 2.5호는 다시는 이런 부탁을 하지 않도록 엿(?) 먹이는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모서리 한쪽에만 희미하게 보이는 에코백 사진, 에코백을 훅 던져서 잔상만 담는 스킬(?) 등 다양한 에코백이 담겨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에코백 사진들을 잔뜩 보내왔다. 그 사진이 너무 재밌어서 인스타그램에 그대로 올렸더니, 사람들이 댓글을 마구 달아 주었다. 귀차니즘이 센스와 창의력으로 발휘되는 책방지기 2.5호라며, 그를 보러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댓글들을 책방지기 2.5호에게 보여줬더니, 좋아한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사진 찍는 요청을 할 때마다 독특한 센스와 창의력을 보여줬다.
알바생 때문에 소설가를 꿈꾸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여행작가의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책방을 열고 책방에서만 머무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걱정했다. 여행 가고 싶지 않냐며, 어떻게 참고 사냐며 물었다. 난 그럴 때마다 책방은 고작 6.5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세계 여행을 해도 만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과 인생,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는 여행 이야기가 아니라 책방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있었다. 그 이야기 중에는 알바생이 했던 엉뚱한 사건에 대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알바생의 이야기를 글로 엮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겪은 알바생과의 일화는 실화라고 하기엔 너무 허구 같은 점이 많았다. 그래서 아예 허구를 덧붙여서 소설처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소설을 써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내 이야기를 읽어 주는 사람, 좋아해 주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서, 2020년 1월부터 10월까지 총 10편을 연재하며 책방 알바생과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었다. 매달 프린팅 해서 우편으로 발송하는 우편 구독으로 정기적으로 소설을 발행하다 보니, 구독자는 2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10편의 소설을 정성스럽게 읽어 주고, 매달 감상평을 보내왔다. 그리고 12월까지 새로운 원고를 더해 2021년 2월 말 드디어 책으로 출간했다.
소설을 쓴다고 하니, 어떤 손님이 묻는다. 소설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래서 나는 답했다. 소설을 쓰세요. 그럼 소설가가 될 수 있답니다. 꼭 상을 받아 등단을 해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있다면 누구나 소설가일 것이다. 그게 책이든, 연재든. 그리고 2021년엔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우편 발송하겠다고 하니, 첫 구독보다 몇 배가 많은 사람들이 우편 구독을 신청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좋지 않은가. 2022년엔 다시 동화를 쓰겠다고 했더니 그때도 구독자들이 있었다.
얽매이는 공간에서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세상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공간이 책방이다. 책방 일 주년을 기념해서는 시집을 발간하고, 이 주년 때는 소설을 출간하고, 삼 주년 때는 에세이를 출간하고 싶은 꿈이 커지는 곳이 바로 책방이다. 계속해서 써놓은 동화를 출간할 예정이고, 또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좁은 곳 같지만, 가장 넓은 책방으로 오세요.
알바생이 에코백 사진이라고 보내온 사진이다. 에코백 사진을 찍어 달랬더니 이런 사진을 찍은 알바생이나, 이 사진을 보곤 재밌다고 온라인 스토어에 그대로 상품을 등록한 사장이나, 뭐 다를 게 있으랴. 하기 싫어서 다시는 시키지 말라고 엉뚱하게 만든 알바생이나, 오히려 이런 점이 더 참신하다며 계속해서 사진을 요구하는 사장이나 평범하진 않은 것 같다. 소설 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