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않는 '최선의 삶'

<최선의 삶>, 임솔아, 문학동네

by 차티 Ch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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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만 있는 건, 얼마나 잔혹한가. 미래는 없고 다짐만 남은 오늘은 또 얼마나 버거운가. 오늘 하루가 싸워서 죽을만큼 힘들고 외로운 최선의 삶이 아니길!


잠시 학교에서 일할 때, 학생들 중에는 분당에 사는 아이들과 판교에 살던 학생들이 섞여있었다. 이제 막 판교가 개발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분당에 살던 아이들과 달리 조금 겉돌았던 판교 아이들. 누구는 판잣집에서 산다는 얘기가 또 누구는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어 떼돈을 벌어 전학 간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어느 순간부터 “어디에 사니?”라는 질문이 잦았다. 또 더 무례할 때는 “어느 아파트에 살아요?”라고 물었다.

이 소설에서 읍내동에 살던 강이가 새 아파트가 들어선 전민동 친구들에게 느꼈던 이방인 같았던 기분이 그랬을까? 강이의 표현처럼 병신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을 만드는 차별과 불합리는 너무 깊고 진저리쳐지고 익숙해지지 않는 폭력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 병신 같아지는 기분. 예측할 수 없어서 다짐만 할 수밖에 없는 그 시절. 강이와 그 또래들이 무리 짓거나 홀로 '최선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너무 잔혹하다.


투어라는 물고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싸워야 하는 운명의 물고기. 누군가와 함께 지내면 죽기 살기로 싸워서 끝장을 보아야 하는 물고기. 결국 혼자 살 운명의 물고기.


소설의 주인공 강이는 자신이 키우는 투어에게 말한다.

“잊지 말아야만 한다. 너는 싸워야만 산다는 걸.”

투어처럼 살아가야 하지만, 여전히 미래는 계획할 수 없고 무섭고 진저리쳐질 강이의 삶을 어찌 다독여야 할지.


강이는 눈을 이상해했다. 무서워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아했다.
언젠가 강이에게 스노볼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이가 발로 건드릴 때마다 반짝이는 눈이 쏟아질 거였다. 더 먼 언젠가에는 강이와 함께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있는 나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12)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의 미래처럼 캄캄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 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다짐으로 점철된 미래를 펼쳐놓았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언이 내게는 다짐뿐이었다.
엄마는 크기가 다른 냄비를 써도 라면 물의 양을 정확히 예측했다. 반장은 중간고사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정확히 예측했다. 선생은 무슨 말을 해야 아이들을 웃을지 예측했고, 아이들은 어떤 말을 해야 선생이 화를 낼지 예측했다. 그렇지만 나는 예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읍내동에서 쌓아왔던 예측의 기술은 전민중학교에서 번번이 빗나갔다. 읍내동 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 교과서를 읽는 아이가 놀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민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모두가 원어민이 되었다. (21)


읍내동에서 그나마 똑똑한 아이로 취급받던 나는 전민동에 오자 멍청한 아이가 되었다. 달라지는 상황 앞에서도 예측이 정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냄비를 쓰든 라면 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어봐야 어떤 선생이든 무슨 문제를 낼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꽃을 키워봐야. 얼마나 많이 꽃을 죽여봐야. 다짐을 더 자주 다지는 것밖에는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다짐에 골몰했다. (22)


투어는 아람을 대신해 나와 살았다. 나는 투어를 강이라고 불렀다. 강이는 평소에는 잘 헤엄치지 않았다. 플라스틱 물풀 뒤에 보라색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침을 먹을 때에도 점심을 먹을 때에도 강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다른 물고기와 함께 있게 된다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온전치 못할 것이다. 상대방이 사라지거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그것이 투어의 운명이었다. 살기 위해서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149)


잊지 말아야만 한다. 너는 싸워야 산다는 걸. (152)


하수관을 그라나다라고 부르기로 했다. 진짜 죽여주는 도시. 나는 그라나다에 강이를 버렸다. 강이는 폐수를 따라 흘러내려갔다. 폐수에는 물살이 있었다. 물살을 따라 흘러가던 강이는 지느러미를 한껏 펼치고 있었다. 죽어가던 강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헤엄쳤다. 강이에게 수족관은 다신 없을 것이다. 강이의 끝은 수족관이 아니었다. 죽음 직전에나 잠시 퍼드덕거리는 광어들과는 달랐다. 강이는 나아갔다. 이 폐수는 강물로 이어질 것이고, 강물은 바다로 이어질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죽음이든, 아니든. (153)


나는 다시 먼 미래를 생각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흙을 퍼먹는 생활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땅속에 사는 지렁이 가족 같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끔찍함에 익숙했다. 엄마와 내가 번갈아가며 꾸어오던 악몽도,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기억도, 주기적으로 끓여먹는 된장찌개처럼 생활이 일부가 될 것이다. 나는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병신 같은 사람들 곁에 병신으로 남을 것이다. (173)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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