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라고요? 제가요? 검사 결과 확실해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하여

by 홍작

01.


병원 중 제일 가기 싫은 곳을 꼽으라면 단연 산부인과다. 성인 여자라면 한 번쯤은 경험했을, 그 특유의 진찰 의자. 다리를 벌리고 앉게 설계된 그 의자가 나는 정말 싫다. 의사가 여자라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가장 은밀한 곳을 보여준다는 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물론 안다. 이런 감정 역시 오랫동안 길들여진 한국 문화의 일부라는 걸, 그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 오십 년이란 시간으로는 이성과 감정의 거리감을 좁히기엔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작고 왜소한 여의사 샘이 안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말투에는 친절함과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까지도 나를 괴롭혀온 통증이 산부인과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솔직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여기저기 아파하니까 지인이 산부인과를 가보라 해서 왔지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말해 보세요.”


작고 왜소한 여의사 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진통제나 소염제 몇 알 처방해줄 거라 생각하며 나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PT를 받다가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오십견이라는 거예요. 충격파 치료도 받아보고, 재활운동도 해봤는데 나아지지 않아 결국 브리즈망 시술을 받고 나서야 겨우 팔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자다가 수면무호흡으로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수면클리닉에서 양압기를 처방받고 괜찮아졌어요. 최근엔 잠을 전혀 못 자요. 삼일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는데 문장이 하나로 연결이 안돼요. 전혀 상관없는 단어만 내뱉고, 그 마저도 기억이 안 나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특히 출근길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한 참을 멍하니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러다 나라는 사람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이고, 힘들었겠네요.”


여의사 샘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맞다, 나 힘들었다. 참 힘들었는데 아직도 난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 힘들다고 잠시 쉬어도 혼낼 사람도 없는데 여전히 난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상황이 힘들다는 것을 나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난 힘들면 안 되는 사람. 난 언제나 어디서나 힘을 내야 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다그쳤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재활 운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아팠던 이유가 나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공감이 큰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피검사부터 하고. 결과 나오면 더 이야기 하죠.”


“피검사는 왜요?”


“갱년기 증상 같아요.”


“갱년기 증상이요? 오십견이랑 불면증이랑 전혀 접점이 없는 데요?”


“갱년기에는 온 몸이 아파요.”


갱년기인데 왜 온 몸이 아프다는 거지? 온 몸이 아프면 갱년기인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미 꽤 오랜 시간 내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싫었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진료를 마치고 피를 뽑는 순간까지도 갱년기가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 달 전에도 생리를 했다. 아닌가? 그 사이 아파서 여기저기 병원을 다니느라 체크하지 못 했는데, 그새 세 달이 지났나? 시간이나 날짜는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언제나 정확하게 기억했는데 이젠 모든 것이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갱년긴가? 아니겠지. 그럼 아니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갱년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갱년기는 노화에 따라 생식 기능이 저하되고 성호르몬의 분비가 급감하며 신체와 정신이 변화를 겪는 시기를 뜻한다. 평균적으로 50대 초중반에 나타나며, 사람에 따라 40대 후반에서 50대 중후반에 나타날 수 있다.

-> 헐. 나무위키가 정의한 갱년기에 따르면 난 갱년기 평균 나이였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공통적 특징
우울, 불안, 짜증, 예민함, 심한 감정기복 등이 나타난다. 안면홍조, 열감, 심계항진, 관절통, 혈압상승도 공통적인 신체적 증상이다. 특히 열감 및 홍조의 경우 여성의 75%가 겪을 만큼 흔하다. 평균 행복도가 낮아지며 우울증이나 조울증 발병률이 가장 높아지는 시기이다. 실제로 연령에 따른 평균 행복도 곡선에서 중년 시기가 가장 낮다.

-> 불안, 짜증, 예민함, 심한 감정기복 맞다. 열감과 홍조는 잘 모르겠고, 최근 남편에게 행복하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 그래서 행복하지 않는 건가? 생각도 해봤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 사랑이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내 감정이 그렇다. 어쩌면 공통 특징처럼 나의 상태가 갱년기가 맞을 지도 모르겠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급감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가 대폭 감소한다. 그래서 스릴감을 주는 자극적인 경험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불륜[1], 유흥업소 출입, 도박 등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다가 가정이 파탄 나고 이혼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절도, 부당이득, 마약, 몰카, 장난전화 등 범죄에까지 손을 대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범죄율은 20~30대가 가장 높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40대 이상의 비율도 상당히 높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대가 갱년기 시기를 겪고 있다고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갱년기 사람에게 욕을 먹어야할 이유는 당연히 없다.[2] 그리고 갱년기라고 절대로 범죄 행위가 정당화되거나 감경될 수 없다.

-> 맞다. 예전에는 남들이 재미없다는 드라마도 재미있게 보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남들이 재미있다는 드라마를 봐도 재미가 없었다. 좋아하던 소설도 재미가 없어져 끝까지 읽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글 쓰는 게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슬프게도 갱년기가 맞는 것 같았다. 내가 굳이 나무위키의 갱년기에 대한 정의를 다 인용한 이유는 가정 파탄과 이혼의 원인이 갱년기 진행에 따른 도파민과 세로토민의 호르몬 감소 때문이라는 분석이 참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덧붙여 갱년기라고 절대로 범죄 행위가 정당화되거나 감경될 수 없다는 경고가 귀여웠다. 어쨌건 나무위키의 경고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갱년기는 분명 인생의 큰 전환점이다. 그 전환점을 어떻게 돌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좀 더 건전한 즐거움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뭐야. 나 이미 내가 갱년기라고 확신한 건가?


노화로 신체기능이 급격하게 쇠퇴하여 암, 치매, 고혈압, 고지혈증, 간경화, 당뇨병, 뇌졸중, 뇌경색, 심근경색, 협심증 등 질병 발병률이 높아진다. 흔하지는 않지만 중년기에 요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술과 담배를 많이 하면 질병 발병률과 사망률이 훨씬 더 높다.

-> 믿고 싶지 않지만 갱년기는 노화의 한 현상이다. 특히 중년기에 요절하는 사람이 있다는 구절을 읽고 깜짝 놀랐다! 중년에 요절하는 사람! 그게 나일 뻔 했다!! 갱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 이제 어떡하지?


피부도 급격히 노화된다. 특히 민감한 부위인 얼굴의 노화가 눈에 띈다. 주름과 검버섯이 생긴다. 수면의 질이 떨어져 피로감을 많이 느끼며, 체온 조절 능력이 약해져 더위나 추위를 지나치게 심하게 느끼므로 불편을 겪게 된다.

-> 다 내 이야기다! 불면증으로 얼마나 고생했던가! 읽으면 읽을수록 이제 갱년기는 나의 이야기였다.


신경계의 노화로 감각도 둔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음식 맛이 싱겁게 느껴져[3] 간을 많이 하게 되는 것, 목욕탕의 열탕이나 고온 찜질방에 어린이나 젊은 사람은 몇 초만 들어가도 매우 고통스럽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오래 버틸 수 있는 것도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 흠. 이건 아직 아니다. 어려서부터 찜질방을 사랑해서 엄마보다 더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난 여전히 싱겁게 먹는 걸 좋아했다. 다행이랄까?


갱년기가 끝나고 노년기가 되면 몸이 완전히 적응되어 갱년기 증상이 사라진다.

-> 이런. 갱년기 증상마저 사라진다면 노인이 되는 것이라고? 누구 맘대로? 흥! 칫! 뿡! 나의 모든 증상이 갱년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생겼지만 난 호락호락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02.


며칠 후, 산부인과에서 검사 결과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미리 준비한 유방 X-RAY 영상과 초음파 결과를 들고 병원을 다시 찾았다. 여의사 샘이 결과지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에스트로겐 수치가 평균치보다 많이 떨어졌어요. 확실히 갱년기에 접어들었어요.”


믿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갱년기의 삶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난감해 하는 나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여의사 샘이 말을 이었다.


“치밀 유방이긴 하지만, 초음파나 X-RAY 검사 결과 양성 종양이나 다른 이상은 없어요. 호르몬 처방을 해 드릴 수 있는데, 처방해 드릴까요?”


“호르몬제를 먹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나요? 그러니까 갱년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여의사 샘이 나의 의도를 파악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호르몬제를 먹는다고 과거로 돌아가거나 더 젊어지진 않아요.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이 여성 호르몬이 100에서 10으로 갑자기 확 떨어지는 변화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소량의 호르몬으로 급격한 변화를 막아 천천히 적응할 시간을 버는 것뿐입니다.”


호르몬제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호르몬제가 유방암을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던데요.”


“10년 전 연구 결과에요. 최근에는 오히려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적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하니 매년 유방 초음파나 X-RAY를 찍을 거예요. 그 결과를 보며 더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할 겁니다.”


이젠 정말 받아들여야 했다. 오십견에서 수면무호흡, 야뇨증, 불면증까지 나를 괴롭히던 증상을 생각한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먹어 볼게요.”


“제일 많이 먹는 안전한 호르몬제부터 시작해 보죠.”


호르몬 약을 처방 받자마자 입에 털어 넣었다. 여의사 샘이 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불면증에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잠을 푹 잘 수 있다면 그 어떤 약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진짜! 진짜!! 진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호르몬을 복용한 이 후 나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고, 더 이상 집을 헤매지 않았고,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서서히 예전과 같은 일상을 되찾았다.


만약 누가 나에게 호르몬이 없는 천국에 갈래? 호르몬이 있는 지옥에 갈래?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호르몬이 있는 지옥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호르몬의 효과는 좋았다. 그러나 호르몬 한 알로 갱년기가 극복되었더라면 이 글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갱년기 극복기는 아직 몇 고비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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