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00

두 개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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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예랑

그 까만 밤, 나는 하늘에 두 개의 달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찬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 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의 달은 멀리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코끝에 있는 것처럼 훤히 보일 만큼 밝았다.'



한동안 기억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삶에서 순간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방금 전 탁자 위에 찻잔을 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이 찻잔을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통화 목록에 찍힌 낯익은 발신 번호를 보며 내가 어디로 전화를 걸었는지 한참 기억을 되짚어도 끝내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기억은 회복되었으나 그때 나는 글을 잃어버렸다. 완전히 도려낸 것처럼 잃어버렸다. 문장을 쓰기 위해 어떤 단어를 힘겹게 떠올리면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재빠르게 뒤를 이어 지워져 갔다. 그것을 깨닫고 나는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꿈길을 걸어도 이보다 더 허망할 수 없고, 짙은 안개 속을 걸어도 이보다 더 슬프고 괴로울 수 없었다. 아무 단어도, 아무 문장도 쓸 수 없다. 그 괴로움은 천벌과도 같았다. 나는 한동안 머리를 감싸 쥐고 울었다. 그리고 그때에 나는 깨달았다. 글을 쓰지 않는 삶, 내게는 그것이 더 괴로운 삶이었다.


그때는 암무暗霧에 휩싸인 듯하였다. 더듬어 만져지는 것이라고는 그 높이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뿐이었다. 그 벽 너머에 모든 문장과 단어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고 축축한 안개와 장대한 벽, 그 앞에 한없이 작은 내가 서 있었다. 나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한 얼굴을 떠올리려는 어느 노인처럼, 아이가 되어 가는 어느 노인처럼 벽 앞에 맥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날이 지났다. 까만 밤중 가로등 아래를 걷고 있으니 불현듯 그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다. 찬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나는 더욱 옷깃을 여몄다. 길에는 아무도 없다. 나 홀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얼마 전 엄마가 여행을 떠나겠다며 책을 한 권 사왔다. 내가 없는 첫 여행이었다. 작은 염려가 들었다. 그러나 여행 가는 날이 가까워 오도록 아무런 준비가 없는 엄마를 보며 나의 마음은 점차 산란해졌다. 낯선 곳에서 허둥대는 엄마의 모습이, 길을 잃은 엄마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아서 내 안에 작은 두려움이 일었다. 누가 모멸이라도 줄까 싶은 마음에 꼭 딸을 먼 곳으로 보내는 것만 같아 시름이 깊어지고 당부가 길어졌다. 나의 당부는 결국 엄마를 두렵게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스스로를 못 미더워하며 잠이 들던 엄마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엄마는 결국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는 곧이어 낯선 거리에서 소녀처럼 웃는 얼굴로, 당돌한 목소리로 내게 씩씩하게 안부를 물었다.

며칠 전 같이 걷던 달 아래를 오늘은 나 홀로 걷는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훤한 달 아래를 성큼성큼 걸으며 또 다른 달 아래에 서 있는 엄마를 생각했다. 글이 쓰고 싶다. 엄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나를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일까.




오래전 그 까만 밤, 글을 잃은 채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누구도 해갈해 줄 수 없는 무력과 무능에 기대어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그러한 나를 곁에 두고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차 안으로 찬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하늘에는 큰 달이 훤하게 떠 있었다. 나는 나를 옥죄어 오는 장대한 벽 앞에 선 채 차창 너머, 두 개의 달이 뜬 세상을 상상하였다. 주차를 마친 엄마는 처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우리 두 사람은 뜨문뜨문 놓인 가로등 불빛을 따라 집으로 걸어갔다. 까만 밤 작은 불빛 아래, 앞선 엄마의 길고 거대한 그림자가 나의 발끝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따라 걸었다. 엄마의 서사를 따라 걸었다. 그때에 불현듯 글이 내게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들어서며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서둘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 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의 달은 멀리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코끝에 있는 것처럼 훤히 보일 만큼 밝았다. 아마도 그날, 그 젊은 엄마가 작은 아기를 업고 다리를 건너던 그날도 오늘과 같은 달이 떴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마치자 암무暗霧가 걷히고 거대한 벽이 일순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까만 밤중 옷깃을 여미며 가로등 아래를 홀로 걷고 있으니 며칠 전 엄마의 목소리가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달이 밝다. 어쩌면 저렇게 동그랗고 밝을까.' 작은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그렇게 작은 미소를 끌어안고 글을 붙든 채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왔다.








'두 개의 달'에서 인용한 글은 산문집 <상미>의 '겨울의 달'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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