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료증과 함께 표현하는 어린이 상을 받았습니다
오늘로 지난 1년간 총총이의 어린이집 생활이 일단락되었다. 작년 3월부터 다녔던 만 1세반을 수료하고, 올해 3월부터는 만 2세반으로 진급한다. 등하원을 도맡아 했던 ‘셔틀파파’로서 감회가 남다르다.
오빠, 정말 괜찮겠어?
작년 이맘때, 1년 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업무 전선에 복귀한 아내는 걱정이 많았다. 잠시 할머니 댁에 가 있는 총총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약 한 달 간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을 아빠인 내가 전담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원하게 육아휴직을 쓰고 싶었지만 육아휴직도 ‘휴직’이라 절차가 번거로웠고 하던 일을 계속 하기는 해야 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한 해의 연차휴가를 모조리 붙여 쓰는 방법으로 약 한 달 간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 정도의 결정도 직장 동료들의 이해와 배려 없이는 쉽게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하는 것 역시 좋은 옵션이었다고 생각한다. 총총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워낙 좋아해서 잘 따르기도 했고, 같이 커가는 3살 터울 사촌 형과 1살 터울 사촌누나가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과의 면담 결과, 마음을 굳혔다. “아버님, 총총이와 함께 지내면서 잘 지켜보셔야 총총이에 대해서 잘 아실 수 있어요.” 맞는 말씀이었다. 부모로서 책임을 다른 가족에게 떠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만 1세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 오늘과 내일이 달랐다.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야기’를 쌓아가게 되었다.
거의 꼴찌로 남아있는 총총이를 생각하면 가급적 정시 퇴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어린이집 등하원을 전담하고 있으니 평일 저녁을 자유롭게 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운 좋게 아내가 정시 퇴근하는 날이 있으면 그날에 맞추어서 일정을 잡았다. 그걸 이해해주는 직장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고마웠다.
출장이 잡히면 총총이는 어린이집 결석하고 할머니 댁에서 지내야 했다. 수족구 같은 전염성 질환이 의심될 때도 일단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한마디로,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그리고 가족들 모두 이 톱니바퀴가 어긋나지 않도록 빈틈없이 쉴 새 없이 달려온 1년. 총총이는 정말 모든 면에서 놀랍도록 성장했다. 신체적으로 한 뼘 더 자란 것은 물론이고, 언어 표현도 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같은 반 14명의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사회적인 스킬이 발달했다.
점심시간에 걸려오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전화에 가슴이 뛸 정도였다. 넘어져서 다쳤다고 하면 외려 마음이 편했다. 다른 아이를 다치게 했다는 끔찍한 소식보다야 그게 나았다.
선생님들은 총총이를 감싸고 이해해주셨다. 그리고 오히려 총총이가 다른 아이를 물기 전에 제지하거나 막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셨다. “아뇨, 선생님들이 잘못하신 게 아닌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날은 하원 할 때 총총이에게 화 아닌 화를 내기도 했다. “친구들 물면 안 된단 말이야. 몇 번을 얘기해. 아빠가 총총이 한 번 물어볼까. 어? 얼마나 아픈지 알아?”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총총이는 눈을 끔뻑거리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총총이를 안고 나도 울었다. 이 얘기를 들은 아내도 울었다. 아내는 총총이를 끌어안고 ‘엄마랑 아빠는 총총이가 어디 가서 미움 안 받았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했다.
거의 매일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통화하면서 총총이의 상황을 이해하고 상태를 공유했다. 무는 욕구가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을 수 있으니 치발기를 다시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드렸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들이 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가정에서도 총총이를 타일렀다. 일관되게 꾸준히. 그랬더니 반응이 있었고, 말문이 트이면서 언어적인 표현 수단을 갖게 된 이후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어떤 이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젊은 처녀들이 무얼 알겠어’ 했지만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전문가’로 존중했다. 실제로 선생님들의 의견과 조언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었고, 특히 아내와 내가 아닌 제3의 시각으로 총총이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하셔라, 저렇게 하셔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부모인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방식이 좋았다. 이런 방식이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 감사함에 어린이집에서 하는 행사는 모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고 노력했고, 연말 행사 때는 공룡 탈을 쓰고 공연까지 했다. 내가 어릴 때는 나의 선생님들께 잘하려고 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를 잘 돌보아달라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알겠다. 잘 봐달라는 부탁의 마음보다 고마움이 훨씬 크다. 부모도 돌보기 힘든 게 아이인데, 그런 아이들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돌봐주시는 선생님들이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이집 덕분에 총총이는 따뜻한 어른들(선생님들)과 관계 맺게 되었고 가족 못지않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같은 반 14명의 또래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고, 통합보육 시간에 함께 노는 형과 누나가 생겼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서로의 욕구를 조정하는 방법을 차츰 터득했다. 아빠와 엄마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가족이 계속해서 한 집에 부대끼며 살 수 있었다. 1년 전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건 아주 큰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