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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박세희 May 06. 2020

폴 그레이엄 - 아이를 갖는 일

[번역] Having Kids by Paul Graham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이 2019년 12월에 자신의 블로그에 쓴 “Having Kids”(원문)를 번역한 글입니다. 아이를 갖는 일이 철저히 두 사람 사이의 ‘선택’ 문제가 되어가는 이 시대에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육성하는 사람이 아이를 갖는 일에 관하여 쓴 글을 읽어보면 새로운 관점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번역해봤습니다. 저도 아이를 기르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혹시 이 번역문이 이해가 안 되시면 원문을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오역 지적 또는 더 나은 번역 제안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2020.5.6.)


아이를 갖는 일 (Having Kids)


아이를 갖기 전에, 나는 아이를 갖는 걸 두려워했다. 그때까지는, 아우구스티누스(※ 역주: 고백록을 쓴 신학자)가 삶을 순결하게(virtuously) 생각했던 방식과 같이 아이에 대하여 생각했다. 내게 아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에 내가 아이들을 원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아이를 가지면, 나는 부모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들이란 — 나도 어린 시절을 겪어서 아는데 — 멋지지 않다(uncool). 부모들은 따분하고(dull), 책임져야하고(responsible), 재미도 없다. 아이가 부모들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건 놀랍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생각을 바꿀 정도의 어른을 보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있는 부모를 볼 때마다, 아이는 공포 그 자체로 보였다. 부모는 고통 받는 불쌍한 존재였다. 부모가 아이를 제압할 때조차도.


사람들이 아기를 낳았다고 했을 때, 나는 열렬히 축하했었다. 뭔가를 해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감흥이 없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다행이다.”(Better you than me), 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아기를 낳았다고 하면, 열렬히 축하를 보낸다. 이제는 진심이다. 첫째 아이의 경우에는 특별히 더 그렇다. 그들은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당연히 내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두려워했던 일은 알고보니 멋진 일이었다.


(c) unsplash


어느 정도는, 그리고 나도 부정하지 않을 것인데, 이 변화는 우리의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거의 즉각적으로 내게 일어난 중대한 화학적 변화 때문이다. 이건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켠 것과 같았다. 나는 갑자기 내 아이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아이들에 대하여 보호적이 되었다.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병원에서 집으로 차를 몰고 올 때, 보행자로 가득한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우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보호받아야 해. 이 사람들 모두 누군가의 자녀들이야!”


그래서 내가 아이 갖는 일이 위대하다고 말하면 내 얘기를 믿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내가 신앙심 깊은 광신도(a religious cultist) 같기도 하다. 이 광신도 집단(cult)에 합류하면 당신도 행복해질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광신도 집단(cult)에 합류해야만 이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게 당신을 행복하게 한다는 식으로 당신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는 아니다. 내가 아이를 갖기 전에 아이 갖는 일에 관하여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에 대한 나의 관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선택 편향(selection bias)이 있었다. 어떤 부모들은 내가 위에서 “아이와 함께 있는 부모를 볼 때마다”라고 쓴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의식하게 되는 때는 당연히 일이 잘못되어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들이 소리를 칠 때만 아이들의 존재를 의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 내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일반적으로 나는 아이들이 있을 장소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아이들을 마주치는 유일한 시간은 비행기 같이 동선이 겹쳐져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곳에서였다. 이건 대표성을 갖춘 표본이 전혀 아니었다. 유아를 데리고 비행기 타는 일을 즐기는 부모는 거의 없다.


부모와 아이들이 더 조용했던 탓에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부모와 아이가 함께한 그 모든 위대한 순간들이었다. 사람들은 이 순간들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마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든 부모들은 어쨌든 그 순간들에 대하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갖는 일에 관하여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는 내가 다른 어떤 곳에 있을 필요도, 다른 어떤 행동을 할 필요도 없다는 감정을 무척 자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달리 특별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어디든 아이들과 함께 가고, 아이들을 침대에 누이고, 공원에서 그네를 밀어주면 된다. 이 순간들을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아이와 평화를 연관지어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다. 당신은 지금 서 있는 곳을 벗어나 다른 더 먼 곳을 볼 필요가 없다.


아이를 갖기 전에도 나는 이런 평화로운 순간들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런데 매우 드물었다. 아이와 함께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내가 아이에 관한 자료를 얻은 다른 소스는 바로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나는 꽤 나쁜 아이였고 항상 이런 저런 문제에 처했었다. 그런 나에게 부모란 기본적으로 법률의 집행자 같이 보였다.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기도 했다.


내가 30살 무렵, 어머니가 내게 우리 남매를 갖고 정말로 기뻤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세상에, 우리 엄마님은 성인(聖人)이시네,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준 모든 고통을 견뎠을 뿐만 아니라 그걸 정말로 기뻐했다고? 이제야 나는 어머니가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우리를 가져서 좋았다고 말한 하나의 이유는 우리와 이야기하는 게 흥미롭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갖고 나서 나도 놀랐다. 당신은 아이를 그저 사랑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당신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정말 재밌다. 어린 아이들은 무언가를 반복하기를 끔찍하게 좋아하긴 하지만 (그들에게 한 번 할 수 있는 일은 50번 반복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아이들과 노는 건 가끔 진심으로 재밌다. 나는 또 놀랐다. 두 살배기와 노는 건 내가 두 살 때는 재밌었지만, 내가 여섯 살 때는 확실히 재미가 없었다. 왜 그 일이 다시 재밌어진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짜 재밌다.


(c) unsplash


물론 고되고 단조롭기만 한 그런 시간들도 있다. 또는 더 나쁘게 공포스런 시간도 있다. 아이를 갖는 건 실제로 그 일을 겪기 전엔 상상하기 어려운 강렬한 유형의 경험 중 하나다. 그러나 내가 아이를 갖기 전에 암묵적으로 믿었던 것처럼 단순히 구명보트로 가도록 되어 있는 DNA는 아니다.


아이를 갖는 일에 관한 나의 걱정들 중 일부는 옳았다. 아이는 확실히 당신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아이들이 있으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지만, 이미 함께 행동하고 있다면, 당신의 시간은 더 줄어들 것이다. 특히, 당신은 일정에 따라 일을 하게 된다. 아이들에겐 일정이 있다. 그게 아이들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게 어른들과 삶을 통합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일단 아이가 있으면 당신은 아이들의 스케쥴에 따라 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에게는 일을 할 뭉텅이 시간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갖기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이 삶 전체로 무분별하게(promiscuously) 흐르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해야 한다. 영감이 흘러넘치건 말건 말이다. 영감이 흘러넘치는 때라도 일을 멈춰야만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데 적응할 수 있었다. 일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방법을 찾아낸다. 만약 그 일이 이뤄질 수 있는 특정한 시간이 있다면, 그 일은 그 시간에 맞춰 이뤄진다. 그러니 만약 내가 아이를 갖기 전처럼 일을 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기 싫다. 야심을 갖고 사는 건(being ambitious) 언제나 내 정체성의 일부였는데, 아이를 갖게 되어 내 야심이 줄어들었다, 고 말이다. 이 문장을 눈으로 보니 가슴이 아프다. 이 문장을 피하려고 바둥대고 있다. 허나 만약 정말 거기에 어떤 의미도 없다면, 왜 내가 바둥대겠는가? 사실은 일단 아이를 갖게 되면,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돌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의력(attention)은 더한 것(+)과 덜한 것(-)의 합이 0이 되는 제로섬게임이다. 한 번에 하나의 생각만이 당신의 마음에 드는 최고의 생각(top idea in your mind)이 될 수 있다. 일단 아이가 생기면, 그 생각은 종종 당신의 아이가 될 것이고, 그 말은 곧 당신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바람을 옆으로 맞으며 항해하기 위한(=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꼼수가 있긴 하다. 예를 들어, 글을 쓸 때, 나는 아이가 알고 싶어할 주제를 생각한다. 그러면 일이 올바르게 진행된다. 내가 Bel에 관한 글을 쓸 때, 아이들에게 이 글을 다 쓰면 아프리카로 데려가주겠다고 말했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식의 말을 하면 아이들은 그걸 언약으로 받아들인다. 그 말은 내가 이 글을 완성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의 아프리카 여행을 빼앗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내가 정말로 운이 좋다면 그런 속임수가 나를 그물에 걸려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어려움)은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런데, 한편으론 당신이 가진 게 어떤 나약한 야심(wimpy ambition)이길래 그 야심이 아이들 때문에 더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인가? 당신에게는 할애할 아주 작은 시간의 여유도 없는가?


그리고 아이가 있다는 상황이 나의 판단력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 예전 기억까지 덮어쓴 건 아니다. 나는 예전의 내 삶이 어땠는지 정말 완벽하게 기억한다. 그리워할 것들이 충분히 많았다. 즉석에서 바로 다른 나라로 떠날 수 있는 그런 능력 같은 것들 말이다. 정말 멋졌다. 내가 왜 그런 적이 없었겠는가?


내가 한 말을 들었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아이가 없던 시절 내가 가졌던 자유의 대부분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걸 외로움의 대가로 지불했지만, 결코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갖기 전, 나는 많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행복한 순간들을 세어본다면, 잠재적인 행복 뿐만 아니라 실제 행복을 모두 포함하여 따져봐도 아이를 갖고 나서가 갖기 전에 비해 더 많다. 이제는 사실상 언제든지 행복할 준비가 되어있다. 잠자리에 들 때는 거의 항상 그렇다.


부모로서 사람들의 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나는 운이 좋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갖기 전에 했던 걱정들은 꽤 흔한 일이다. 다른 부모들이 자녀들을 볼 때 짓는 얼굴을 보면서 판단하려면, 아이들로 인해 얻는 행복도 꽤 흔한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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