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양준일 세바시 강연 영상을 보고
3월에 본 영상입니다. 이 영상을 본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네요. 그런데 지금도 특정 장면의 내용이 떠올라요. 자꾸 곱씹고 반성하게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브런치에 공유합니다.
양준일씨는 경쟁이 심한 한국 사회를 의자놀이(Musical Chair)에 비유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어요. 한국 사회는 경쟁이 심해서 문제가 아니라 경쟁이 불필요한 영역에서 경쟁을 하고 경쟁이 필요한 영역에서 경쟁이 부족한 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듣고 있는데, 이 영상의 주제는 그게 아니더군요.
이 영상의 진짜 주제는 영적으로 교감하며 사는 법입니다. 매우 종교적인 주제인데요. 연사로 나선 양준일씨는 굳이 종교를 이야기의 통로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 배웠습니다.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고도 충분히 종교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을요.
저도 아이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하면서도 불편한데,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그 불편함의 이유가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양준일씨는 잔소리를 “아이를 향한 육체적인 대화”라고 정의합니다. 아이와 나를 분리하고, 아이의 행동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요. 여기서 하나 더 배웠습니다.
어른이지만 저도 가끔 잔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왜 기분이 나쁠까 생각해봤습니다. 양준일씨의 말이 맞더군요.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분리하고, 듣는 이의 행동에만 초점을 두어 이야기하는 “육체적인 대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방향의 잔소리는 대화라 할 수도 없습니다. 대화는 쌍방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니까요.
서로 교감하지 못한 채 텅빈 말을 주고 받는 대화, 관계를 양준일씨는 “육체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와 대비되는 표현은 “영적”입니다. 영적인 대화, 영적인 관계입니다. 양준일씨는 그 핵심을 “with(함께)”라고 짚었습니다. 나와 남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묶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배우자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말하기를 돌아봤습니다. 말하기의 수준이 언어의 수준이 육체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지 반성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좀 더 나아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