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 할 시간에 직접 살림을 할 일이다
새해 목표로 주말 여섯끼를 내가 맡겠다고 선포한지 이제 겨우 보름 지났다. 그 사이 주말은 두 번 정도 찾아왔다.
매 끼니를 내가 a부터 z까지 요리를 한 건 아니지만 (반조리제품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배달 음식을 먹기도 했지만) 어지간하면 내 손으로 가족 식사를 준비했다.
해보니까 요리는 차라리 쉽다. 뚝딱 뚝딱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재미와 보람도 있다. 문제는 설거지였지만, 그것도 내가 맡아서 마무리 했다.
이 글에는 나의 그간의 살림에 대한 소회를 쓸 것이다. (지금부터 딱 15분 간 몰입해서 쓰고 퇴고 없이 글을 발행할 것이다.)
예전에 살림은 위대한 것이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니 대강 앞부분만 읽다 말았던 것 같다. 살림은 말그대로 '살리는 일'이니 "살림이나 해"라는 식으로 폄하되어서는 안 되고 위대한 것이라며 칭송하는 투의 글이었다. 그땐 참 신선한 시각이라 느꼈는데 지금은 그 글을 삐딱하게 읽고 싶다.
그러니까, 살림을 위대하다 하는 사람 중에 살림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은 것이다. 그렇게 위대하면 계속 살림을 할 것이지 왜 글을 쓰고 있담. 자기는 살림을 하기 싫으니까 남더러 하라고 하고 위대하다고 치켜세우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해보니까 살림은 위대하기는 한데...,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대단한 의미 부여(나는 지금 이 세상을 구원할 미래 인류의 지도자 - 우리 아이들 - 에게 먹일 음식을 만드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구!)를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 감성에는 맞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살림은 그냥 살림이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걸 군소리 없이 생색도 내지 않고 하는 건 정말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일이다. 대표적으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지금의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엄마. 누나랑 나 밥 해 먹이기 정말 지겹지 않았어? 난 아침 먹이고 돌아서면 점심 먹여야 하고 간식 먹여야 하고 돌아서면 다시 저녁 먹여야 하니까 진짜 지겹던데."
아마도 어머니는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버지는 경제 활동을 전담하셨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한 분업) 하셨을 것 같다. 물론 지겹고 짜증나고 귀찮고 힘드셨겠지만, 적어도 나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군소리를 하셨던 적은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살림만 하라는 법은 없어. 싫으면 안 해도 돼.'라고 알려줬으면 좋겠다.
여담인데, 아버지가 어머니더러 살림을 잘 못한다고 구박을 하셨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내 속마음('아니 그렇게 잘 하시면 어머니를 구박할 게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하시지, 왜?')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황당한 건 실제로 아버지는 살림을 무척 잘하셨다. 살림은 잘하셨지만 어떻게든 어머니를 잘 구슬려서 더 요령 있게 살림을 하시도록 하는 능력을 갖추진 못하셨던 것 같다.
나도 어지간하다. 살림은 지겹고 귀찮은 일이라는 걸 이렇게 길게도 썼다. 아무튼 살림은 위대하다고 쓴 이도 자기 자신이나 자녀들이 살림만 하고 사는 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아이들이 부엌력을 갖추길 바라지만, 살림만 하며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예전 글: https://brunch.co.kr/@chchpapa/54
누구라도 살림을 하기는 해야 한다. 돈이 있으면 모조리 아웃소싱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편이 여러모로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된다.
사소하지만 자기 효능감도 느낄 수 있고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기도 한다. 명상적 효과도 있다. 나 역시 살림을 전혀 하지 못했던 예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훨씬 만족스럽다.
결론은? 살림을 하자. 위대한 일까진 아니더라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고 직접 할 보람도 있는 일이다. 진창은 더럽고 냄새나지만 다른 이가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진창도 있는 것이다.
하나 더. 누구든 살림만 하고 살지는 말자. 한시적으로라도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살림만 한다면 갈수록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누구도 그렇게 살도록 방치하지는 말자.
부록/
미래의 아들들에게:
사랑하는 아들들아, 살림을 잘 하고 있니?
살림을 하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난다면, 돈을 조금 들여서 멋진 앞치마를 한 번 사보렴.
아빠는 짙은 곤색 줄무늬 앞치마를 선물 받고 무척 신나게 집안일을 했단다.
너희들도 주말 마다 아빠가 그 앞치마를 목에 걸고 집안일을 했던 게 기억이 날 거라 믿는다.
추신: 얘들아, 혹시 모든 집안 살림을 로봇이 대신 해주는 그런 좋은 세상이 벌써 와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몹시 부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