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9시는 9시 1분이기도 하다

작년 말에 회사를 옮겼다. 이직(移職).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와서 가는 행선지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 공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 내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까지 송두리째 달라졌다. 그리고 그 영향은 나 하나에만 미치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삶에도 변화가 있었다.


둘째 아이는 나의 퇴사일에 맞춰 직장 어린이집에서 나와야 했다. 순조롭게 적응해서 1년 넘게 재원하고 있던 곳이었다. 내가 퇴직 의사를 밝히고 관련 부서에 직장 어린이집 퇴소에 관한 절차를 문의했던 때가 기억이 난다. 돌아온 답이 예상 이상으로 건조한 톤이었다. 조금 놀랐다.


새 회사의 소재지는 역삼동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여의도를 들렀다가 역삼동으로 가야했다. 첫째 아이의 유치원이 여의도에 있기 때문이다. 입학한지 6개월 만에 다시 새 유치원으로 전학해서 적응을 하라는 건 만 5세 아이에겐 조금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내. 아내도 갑자기 등하원 전쟁에 참전을 해야했다. 서울 밖으로 출근을 하는 상황에서도 어렵게 어렵게 날을 빼서 주중 며칠씩 등하원을 맡았다. 그 덕분에 나는 출퇴근에 약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주로 하원 담당은 나였다. 역삼동에서 여의도 가는 길이 얼마나 꽉꽉 막히던지.


아빠가 이따 늦지 않게 데리러 올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매번 늦었다. 저녁이 되면 첫째 아이의 유치원에서, 둘째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각각 전화가 온다. 아버님,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세요? 각자의 자리에서 최후의 1인이 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역시 최후의 1인 선생님들의 다급함이 여과없이 전해진다.


헉헉 대며 달려가도 나는 이미 늦어있다. 첫째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있다. 아빠, 아빠가 아까 일찍 온다고 말하지 않았어? 가슴이 미어진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머무를 시간이 없다. 바로 차를 몰아 둘째 아이의 어린이집으로 간다. 차 뒷좌석에 아이 둘을 태우고 나면 그제야 호흡이 트이는 느낌이다.


일찍 데리러 온다고 하고 늦는 아빠.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 아빠. 나는 어쩌다 이런 아빠가 되었을까. 그래서 아예 시간을 정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나도 지금처럼 기약 없이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총총아, 아빠 이따 6시 30분까지 데리러 올게, 알았지?


총총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빠, 1분 정도는 늦어도 괜찮아. 알았지? 그러니까 6시 31분에는 꼭 와야해.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총총이를 뒤로 하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감정이 휘몰아쳤다. 곱씹게 되는 말이었다. 1분. 1분은 늦어도 괜찮다.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 아빠에 대한 실망도 미덥지 못한 마음도 있지만 그럼에도 또 한 번 아빠에게 기회를 주는 말이었다. '그래, 총총아. 아빠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약속을 꼭 지킬게.' 다짐했다.


9시 1분은 9시가 아니라는 문장은 우아한형제들 홈페이지에서 처음 봤다. 지금  봐도 신선하다. 맞는 말을 저렇게 재밌게 전달하는 내공이다. 그래도 나는 가끔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1분까지는 늦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9시 1분에는 꼭 오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 역시 부모의 부족함을 참아주고 있는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