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터무니 없는 일 후보
오늘은 정말 개운하게 오전 5:30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난 김에 테니스 모임 다녀왔다. 테니스 모임을 가려고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정말 일어난 김에 다녀왔다. 몇 개월 만에 라켓을 잡았고, 공을 제대로 치는 일보다 내 머리를 치며 자책하는 일이 더 많았지만 역시 공놀이는 즐거웠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다. 친구네 아이들과 놀기로 했다며 나는 오늘 하루 집에서 편하게 쉬라고 한다. 이렇게 얻은 자유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다가 OTT 앱을 열어 [슬픔의 삼각형]이란 영화를 한 편 봤는데, 영화를 요약해주는 서비스에서 이미 주요 장면을 다 봤던 터라 너무나 시시하게 느껴졌다.
거기서 앱을 닫았어야 했는데… 나는 [차시천하]라는 40부작 드라마를 시작하고 말았다. 이 드라마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강호 무림의 절세고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마침 두 남녀는 각각 제후국의 왕자이자 공주인데, 천하의 정세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며, 마침 왕위 경쟁까지 격화되어 궁중 암투가 벌어지나, 두 남녀의 무공과 지혜와 사랑으로 모두 이겨내고 끝끝내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장르로 치자면 고대 무협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중국 역사 속 춘추전국시대를 옮겨 놓은 것 같은 제후국들의 경쟁과 무협지의 어느 장면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강호 무림 고수들의 무공 액션과 열국지의 한 부분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왕족들의 궁중 권모술수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40부작이라는 대하드라마를 빼곡하게 채운다. 40부작이라서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고,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가 없다.
어디서 본 듯한 어디서 읽은 듯한 어디서 들은 듯한 이야기를 그러모아 이런 대작을 만들었다. 요리로 비유하자면 있는 재료 없는 재료 다 넣어서 끓였는데 이게 잡탕찌개가 아니고 꽤 고유한 맛이 난다. 강약을 조절하는 각본과 연출의 힘이 대단하고,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시청자들도 여기까지 왔으니 엔딩까지 달려야지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심정도 있겠지만, 그래도 야 정말 이건 아니다 싶은 순간은 없었다.
그래도 이 드라마만의 특장점 하나가 있진 않을까. 그게 없으면 안 되지 않을까. 나는 주인공들의 비주얼이라고 하고 싶다. 그 비주얼을 보면서 감탄하느라 그냥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다 납득이 된다. 그리고 역시 인류 보편의 정서에 호소한다. 모자지간의 정, 형제지간의 우애, 군신간의 충과 예, 동지끼리의 의리,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까지. 적고 보니 예전에 봤던 [랑야방]과도 비슷하다. [랑야방]과 [차시천하]를 둘 다 본 사람이라면 분명 동의할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40부작을 몰아보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오늘 한 일: 테니스 다녀와서, [차시천하] 40부작을 몰아서 봤다. 이로써 올해의 터무니 없는 일의 강력한 후보가 되었다. 푹 쉬는데 이 방법 밖에 없었을까 싶지만, 한 번 시작했더니 중간에 애매하게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