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1) 를 읽고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집 앞 놀이터에서 엄마-아들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 탁구채로 셔틀콕을 치며 노는 걸 보았다. 배드민턴이라고 해얄지, 탁구라고 해얄지. 최근 인기라는 피클볼을 떠올렸다. 탁구채 보단 크고 테니스채 보단 작은 라켓을 들고 구멍이 숭숭 뚫린 공을 때리며 네트를 넘기는 스포츠다. 테니스와 비슷하지만 테니스는 아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 피클볼과 같은 스포츠는 원류는 같지만 끝은 다른 ’이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저 오쏘독스한 테니스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천해온 것임에도.
존재와 명명 — 이 철학적 순환고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나태와 무식이 나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의 사려 깊지 못한 이름 짓기에서 시작된 어떤 연구가, 운동이, 정치가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여러 인간들의 삶을 짓누르고 파괴하고 밀어내어 결국에 ‘의미’마저 박탈하는 역사를 우리는 겪어왔다. 인식하는 세계에 이름을 주고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는 작업들은 ‘질서’를 선호하는 인간 본성 때문이라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혼돈‘을 두려워하고 ’무의미‘를 참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언젠가 아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져온다면 그래, 우리는 우주의 먼지일 뿐이야, 신은 없어, 내세도 당연히 없고, 운명이라거나 초월적인 계획 같은 것도 사실은 없어, 나도 너도 그저 무의미한 존재들일 뿐이야, 라고 대답하지 않을 테다. 설령 그게 진실이라도! 아니 그게 정말로 진실일까. 대신에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싶은 문장들을 생각날 때마다 써두어야 겠다.
국문 번역이 정말 좋다. 이 번역가의 작업물을 따로 모아서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