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랜만에 대학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이 후배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고, 나보다 한 해 늦게 아이가 생겼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눴다. 뭔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내 딸이 이제 17개월 정도 되었어. 나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내가 육아 관련 이런저런 글을 쓰고, 육아 서적도 읽고, 아빠들 모임도 하는 것을 알고서 하는 이야기였다. 그 후배는 여느 워킹대디와 다를 바 없이 주중에는 바쁘게 일하느라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래도 주말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그밖에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해줬다. 조만간 아이와 함께 만나서 주말에 같이 놀자고 얘기하고 통화를 마쳤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빠가 된 주위 친구들도 다 같은 마음이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이것도 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사회 현상이다. ‘아빠’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하여 이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세대가 예전에도 있었을까.
우리 아버지 세대는 대부분의 공력을 ‘바깥 일’에만 쏟았고, ‘안 일’의 일부로 여겨졌던 자식과의 관계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영화, 드라마를 보아도 아버지와 자식은 마치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처럼 그려진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세계가 있고, 자식에게는 또 자식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가 겹쳐지는 일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다. 당사자에게는 극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그 아버지들이 다 ‘나쁜’ 아버지였을까. 나는 또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무뚝뚝한 아버지라고 다 나쁜 아버지일리 없고, 친구 같이 다정한 아버지라고 다 좋은 아버지일리 없다. 무 자르듯 딱 잘라 이야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일관성이 없다면 어느 경우라도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 세대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경제∙문화적 자장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도 자식과의 관계에 대하여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게 꽁꽁 숨겨두는 바람에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말이다. 나는 아버지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비극’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할 뿐, 안타깝게 생각할 뿐.
아버지란 존재는 세상 모든 자식들의 숙제이다. 문제는 그 중 어떤 이들은 또다시 그 아버지의 역할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그들 중 대다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 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완벽한 준비란 없다. 아버지가 되었고, 아버지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자각하고 있다면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할까. 아이의 삶에 함께 하면서 계속 배우고 실수하고 하면서 아이와 같이 커나갈 수밖에.
‘좋은 아버지가 되겠다’라는 말은 마치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읽힌다.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자꾸 반복적으로 되뇌어보았자 그게 현실적인 목표가 되는 건 아니다. 나는 감히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아빠가 되고자 고민하는 아빠들은 이미 좋은 아빠라고. 다만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하는 마음과 고민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