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어야 선명해지는 것들

빗소리와 함께 걷다

by 책사랑

비 오는 날, 나는 투명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장화 바닥에는 작은 물결이 생긴다.

평소 같으면 불편할 뿐인 비 오는 풍경이지만

산책길 위에서는 마치 세상이 조금 느려진 듯

모든 것이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비 오는 날 산책로에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래서 천천히 걷기가 더 좋다.

이 길이 내 세상이 된다.

투명 우산 너머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규칙적이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나는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마음을 쉬게 된다.


투명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는 창문 밖을 보는 것처럼 운치 있게 느껴진다.

그게 바로 투명우산을 들고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작은 소리와 함께 마음도 조용히 흘러간다.

물이 고인 웅덩이를 지나갈 때 장화는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큰 웅덩이라 할지라도 발을 담그는 순간 느껴지는 차가움과 젖음의 불편함은 장화 덕분에 보호된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 없이 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듯 첨벙첨벙 씩씩하게 장난치듯 걸을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과 긴장이 사라지고 단순한 즐거움만이 남는다.

비에 젖은 풍경은 나의 눈을 맑게 하고 색을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초록 잎사귀 끝마다 맺힌 물방울이 햇살을 받으면 반짝이다 떨어지고

흠뻑 젖은 강아지풀은 물방울마저도 선명하게 빛난다.

목련과 무궁화 같은 꽃잎 끝에도 작은 물방울이 머금어져 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며 깨끗하고 아름답다.

잠시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사소한 풍경조차 경이롭게 느껴진다.


회색 하늘은 낮게 내려와 안개가 낀 듯 건물을 부드럽게 감싸고 멀리 산은 안갯속에 잠시 숨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느려진 느낌이다.

우산을 쓴 사람들은 각자의 색을 품은 작은 섬처럼 길 위를 걸어간다.

발걸음은 빗소리에 묻혀 조심스럽고 자동차 불빛은 젖은 도로 위를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달린다.

모든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용히 이어진다.


길을 걷다 보면 빗물과 세상이 하나로 느껴진다.

젖은 풀잎, 반짝이는 물방울, 흐르는 빗줄기 속에서 엉켰던 생각들이

자연스레 정리되고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서두르던 하루의 속도는 느려지고 조금씩 숨을 고르는 사이 내 안에는 작은 평화가 스며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젖은 옷을 벗어던지면 밖에서의 고요는 이내 집 안의 온기로 치환된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인 뒤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뽀얀 증기 너머로 조금 전 내가 걸었던 그 빗길을 가만히 응시한다.


커피의 쌉싸름한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 마음속에도 작은 불씨가 피어오른다.

창밖을 바라보며 아주 느리게 호흡하는 이 시간

하루 종일 나를 들볶던 소란스러운 생각들은 어느새 힘을 잃고

그 자리에 고요한 평온함이 차곡차곡 차오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장화 덕분에 웅덩이를 두려움 없이 내디뎠듯

어쩌면 삶이라는 길 위에서도 나를 지켜줄 단단한 마음의 장화 한 켤레가 필요했음을

비에 젖어야만 비로소 선명해지는 강아지풀의 초록처럼

나 또한 세상을 적시는 시련이나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스스로의 채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늘 맑은 날만을 원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기에는 이런 흐린 날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비가 세상의 색을 잠시 낮춰주듯 내 삶의 소음도 함께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무언가를 더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창밖에는 여전히 빗줄기가 스미고 있지만

내 안을 어지럽히던 소란은 어느새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온기가 남은 잔을 내려놓으며 기분 좋은 마침표를 찍어 본다.

내일 아침은 오늘보다 조금 더 가벼운 숨을 내쉬며 깨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