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부르는 빨래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신 날, 문득 빨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거실까지 밀고 들어온 볕이 차가운 공기를 데우며 공간을 채운다.
이 햇살이 금세 사라져 버릴까 봐 혹은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워 마음이 바빠진다.
빨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작은 의무는 이내 기분 좋은 활력이 되어 나를 움직인다.
라디오를 켜고 세탁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양팔 가득 들린 이불은 무거워지는데 신기하게도 기분은 점점 가벼워진다.
세탁조에 이불을 하나씩 넣을 때마다 작지만 확실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발라드가 흘러나와 내 귀를 부드럽게 감싼다.
추억 속 어느 날의 멜로디가 마음을 톡톡 두드리고 나는 혼자 흥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잠시 뒤
콸콸하며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려오면 마음의 소음도 함께 잦아든다.
규칙적으로 찰랑이는 그 물소리는 세상의 어떤 백색소음보다 감미롭다.
세탁조 안에서 옷감들이 물과 섞여 내는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은 마치 나를 위로하는 듯하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도 정직하게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신기하게 머릿속이 맑아진다.
물살이 회전하며 때를 씻어내는 동안
내 마음속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걱정과 불안들도 함께 씻겨 내려간다.
세탁조 안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묘한 쾌감을 준다.
뒤엉킨 옷가지들이 거품 속에서 구르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마치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우리네 삶의 과정과 닮아 있다.
탈수가 끝나고 문을 열 때 풍겨오는 은은한 세제 향과 기분 좋은 습기
그리고 빳빳하게 턴 옷을 건조대에 널 때의 상쾌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구겨진 소매를 탁탁 털어 펴고 간격을 맞춰 나란히 널어가는 행위는
흩어진 일상을 다시 정렬하는 일과도 같다.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나는 빨래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나의 하루가 다시 깨끗하게 시작될 준비를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문득 소설 속 따뜻한 문장 하나가 내 마음에 내려앉는다.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연남동에는 하얀 거품 파도가 치는
눈물도 슬픔도 씻어 가는
작은 바다가 있다.”
그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한다.
내게도 나만을 위해 부지런히 파도치는 비밀스러운 바다가 있다.
바로 우리 집 한편, 쉼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속이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는 차마 세상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의 탄식과
소란스러운 마음의 소음을 넉넉히 덮어준다.
세탁조 안에서 일어나는 하얀 거품 파도는 눅눅하게 젖은 어제의 상념들을 묵묵히 씻어내고
뒤엉킨 걱정의 타래들을 부드럽게 풀어헤친다.
빨래가 경쾌한 리듬을 타며 돌아가는 한
내 안의 바다는 언제나 맑게 갠다.
고단했던 기억들이 비워지고 깨끗하게 헹궈진 마음 위로
이제는 기분 좋은 햇살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저 빨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매일 이 작은 바다에 고단함을 던지고 뽀송하게 마른 희망을 건져 올린다.
오늘도 나는 세탁기 속 작은 바다와 마주 앉아 나의 하루를 가장 투명한 빛으로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