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이 단단한 나를 만든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마주해야 했던 일기장은 내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단조로운 일상의 공기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그리 대단하게 기록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공책을 앞에 두고 몽당연필만 굴리며 "참 재미있었다"로 끝나는 뻔한 문장을 쥐어짜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의 내게 글짓기나 독후감은 표현의 즐거움이 아니라, 어린 어깨를 짓누르는 고단한 노동이자 숙제라는 이름의 무거운 돌덩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나는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펜을 든다.
누군가에게 검사받기 위해 억지로 채워 넣던 칸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세상 그 누구에게도 차마 내뱉지 못한 내밀한 이야기들이 자리 잡았다.
마음속에서 엉망으로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고민을 활자로 하나씩 옮겨 적다 보면
신기하게도 뜨겁게 치솟던 감정의 온도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소란스러웠던 내면의 파도가 잠잠해지고 비로소 고요가 찾아온다.
매일 써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그저 마음이 시키는 날 손끝이 종이에 닿고 싶은 날에만 적어 내려가는 그 한 페이지는 이제 나를 치유하는 가장 정갈하고도 고유한 안식이 되었다.
나는 하얀 종이 위로 잉크가 번지고 스며드는 모양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간을 사랑한다.
아주 얇은 글자의 획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문장을 이루고
그 문장들이 차곡차곡 몸을 포개어 하나의 온전한 문단을 빚어내는 과정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그 작은 활자들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그 글을 쓸 당시 나의 거친 숨결과 가느다란 시선
그리고 내가 묵묵히 통과해 온 구체적인 시간의 무늬가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치열했던 삶의 현장에서 지칠 대로 지쳐 돌아온 밤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쥐는 순간 글은 아무 말 없이 나의 고단한 하루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다.
"오늘도 참 애썼다"라고,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 따스한 온기를 내어주며 나를 토닥인다.
기록이라는 행위가 아니었다면
그저 허공으로 휘발되어 영원히 사라졌을 찰나의 순간들이 참 많다.
하지만 나는 글을 씀으로써
그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불러내어 내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 선명하게 새겨 넣는다.
그렇게 한 장씩 쌓여간 기록들은 어느덧 내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는 깊고 고요한 호수 같은 힘이 되었다.
쉽게 흔들리고 한없이 여리기만 했던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을 느낀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사소하고 평범한 메모에 불과할지 몰라도
내게 이 기록들은 인생의 거센 풍랑이 몰아쳐도 나를 붙들어 지탱해 주는 아주 굵고 튼튼한 기둥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풍경의 경이로움
책장을 넘기다 심장에 툭 하고 떨어졌던 문장의 울림
혹은 불현듯 스쳐 지나간 투명한 생각들을 나는 오늘도 정성껏 꺼내어 놓는다.
시작은 서툴러도 좋고 내용이 사소해도 괜찮다.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기록들이 켜켜이 층을 이루다 보면
언젠가 거친 바람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써 내려가는 이 작은 힘이 내일의 나를 더 단단하게 빚어내고
그렇게 이어지는 '쓰는 삶'이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뿌리를 완성해 간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를 살게 하고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나만의 문장을 정성스럽게 적어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