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빛으로 머무는 지금

결과라는 열매보다 눈부신 '과정의 싱그러움'

by 책사랑

앙상한 가지만이 허공을 지키던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 어느덧 연두색 새싹들이 파릇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햇살을 조금 더 정면으로 마주한 나무들은 벌써 제 몸을 연둣빛 잎사귀들로 빼곡히 채워 나간다.

머지않아 세상을 덮을 짙은 초록의 무게가 당도하기 전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허락된 수줍은 연두는 형언할 수 없이 싱그럽고 풋풋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맑은 하늘빛이 지친 눈을 씻어내듯 청명하다.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공기 중에 섞인 향기로운 연둣빛 계절감을 가슴 깊이 들이마셔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릴 때면 나는 눈을 찡긋 감으며 그 찰나의 눈부심을 만끽한다.

그 빛줄기는 마치 나에게만 살며시 건네는 희망의 메시지 같아서

"그래, 너도 이 잎들처럼 다시 피어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따스한 응원처럼 들려온다.

그 한 줄기 빛에 일순간 환해진 기분은 정체된 일상에 활기를 선물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오면 연둣빛 세상은 비단결처럼 파도치며 일렁인다.

그 찬란한 춤사위를 보고 있으면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번지고

연둣빛 향기를 마시며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온전한 평온을 느낀다.

이 계절의 다정함에 속수무책으로 흠뻑 젖어들며 문득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무가 저토록 고운 잎을 틔우기 위해 얼마나 긴 겨울을 인내했을지

거칠고 앙상했던 시간들이 이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추운 겨울을 지낸 나무가 봄을 맞아 가장 먼저 내놓는 것은

화려한 꽃도 풍성한 열매도 아닌 그저 작고 수줍은 연둣빛 새순이다.


어쩌면 우리 삶의 회복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거창한 성과를 증명해 보이기 전에 메말랐던 마음에 연둣빛 생기부터 채워 넣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다.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아 괴로웠던 무채색의 시간들은

사실 고단했던 내 마음이 다시 파릇해지기를 묵묵히 기다려준 다정한 배려였다.


자연의 순리가 그러하듯

나 역시 내 안의 계절이 흐르는 대로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기다려 주기로 했다.


우리는 흔히 결실이라는 결과에만 시선을 두곤 하지만

연두라는 빛깔은 성취보다 초록이 되기 전 그 '과정의 싱그러움'을 먼저 가르쳐준다.


나무의 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찰나는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라

생명의 에너지가 막 터져 나오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 삶의 방향도 ‘무엇이 되는가’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빛을 머금고 있는가’에 맞추고 싶다. 무언가 완성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미숙하고 연약한 현재의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눈부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피어나는 중인 지금 이 채워지지 않은 모습이야말로 내 삶에서 가장 나다운 풍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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