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해하고 달콤한 사치

​나를 안아주는 가장 다정한 방법

by 책사랑

무엇을 해도 마음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날이 있다.

분명 눈은 활자를 쫓고 있는데 마음은 문장 위에서 미끄러져 자꾸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몇 번이고 같은 줄을 읽어 내려가다 결국 책을 덮었다.


거울 속의 나는 어찌나 고단해 보이는지, 발바닥까지 내려온 듯한

다크서클이 마치 "제발 좀 쉬게 해 줘"라고 외치는 비명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이제 그만 멈춰달라는 내 몸의 절박한 경고등이었다.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려보려 몸을 일으킨다.

집 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세탁기를 돌리며 일상의 궤도를 억지로 맞춰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매끈한 에센스를 얼굴에 바르며 흐릿해진 감각을 깨워보려 애써본다.

쌉싸름한 커피 향도 당을 보충하기 위해 평소보다 진하게 탄 믹스커피 두 봉지의 달콤함도 잠시뿐..


하얀 모니터 위에 깜빡이는 커서는 마치 내 막막한 심장을 대신해 뛰고 있는 것만 같다.

단 한 줄의 문장도 허락되지 않는 빈 문서 앞에서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오늘의 나는 더 이상 꺼내 쓸 에너지가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결국 나는 나 자신과 기꺼이 타협하기로 했다.

책상 앞에서 버티는 고집을 내려놓고 보송보송한 이불을 길게 펴고 몸을 눕힌다.

리모컨을 쥐고 평소 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주행 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팽팽했던 마음의 끈이 느슨해진다.

화면 속 이야기에 정신을 놓는 순간, 오히려 몸과 마음은 가장 편안한 궤도로 돌아온다.


이것은 단순히 몸의 고단함을 달래려는 게으름이 아니다.

내 몸이 내게 보내는 가장 정직하고도 간절한 시그널이자

그동안 '성실'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여 왔다는 뒤늦은 고백이다.

기계조차 배터리가 다 되면 멈춰 서야 하듯

사람의 마음에도 온전한 멈춤과 충전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왜 이토록 잊고 살았던 걸까.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마음껏 푹 쉬어.”라고 속삭이는 내 몸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한 순간, 비로소 내가 나에게 얼마나 무심한 주인이었는지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한 돌봄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쉼 없이 채워 넣어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 믿었던 강박을 내려놓을 때,

비워낸 자리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맑은 힘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억지로 활자를 읽어 내려가려던 오만함을 버리고

오늘은 그저 내 몸이 보내는 시그널에 온전히 나를 맡겨본다.


방전된 나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마음껏 게을러져 보는 이 하루

믹스커피의 인위적인 단맛보다 더 깊고 달콤하게 감도는 이 고요한 휴식은

오늘 내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귀하고 따뜻한 화해의 선물이다.


마음의 배터리가 바닥난 자리마다 역설적이게도 비워진 깊이만큼의 평화가 고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채근하며 살아왔던가.

삐걱거리는 몸과 닳아버린 마음을 모른 척하며 억지로 일상의 톱니바퀴를 돌리려던 고집스러운 마음을 이제야 가만히 내려놓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을 툭 놓아버린 자리에는 세상의 소음 대신 내 안의 가장 깊고 정직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곳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라는 이름의 울창하고 깊은 숲이다.

나는 그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 잠시 누워 쉬어가기로 했다.

마른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보드라운 햇살을 이불 삼아 덮고 타인의 시선도 내일의 걱정도 닿지 않는 그곳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침묵을 만끽한다.


이 고요한 숲에서 나는 더 이상 닳지도 상처받지도 않은 채 온전한 '나'로 다시 태어난다.

오늘의 이 게으른 평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달콤한 사치.

이것은 지친 나를 다시 숨 쉬게 하는 가장 다정한 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