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의 행복, 검은 봉지의 다정

값싼 동전과 값진 진심

by 책사랑


3월의 어느 날 핸드폰 알람보다 먼저 나를 깨운 건 배민 앱의 '핫딜' 알림이었다. '00 커피 아메리카노 100원'.

그 소박하고도 강력한 유혹에 못 이기는 척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아침 공기는 제법 쌀쌀했지만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졌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니 도시의 거대한 엔진이 이미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앞에는 각기 다른 속도의 아침이 펼쳐졌다.

길 위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교차하고 있었다.


가방을 고쳐 매며 친구와 장난치는 중학생들

노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엄마들의 손길

그리고 구두 소리를 가쁘게 울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직장인들의 뒷모습까지


가장 시선을 붙잡은 건 어린이집 앞에 멈춰 선 작은 실랑이였다.

"안 가!"를 연발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아이와

난처한 듯 웃으며 아이를 달래는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손주를 지긋이 바라보며 가방을 대신 메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

그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소음들은 결코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가장 정겨운 알람 소리였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서

'아,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살아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옅은 미소가 번졌다.


도심의 활기를 지나 드디어 카페에 도착했다.

단돈 100원에 손에 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컵 홀더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기분 좋게 손바닥을 적셨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 동네 골목골목을 살폈다.


평소엔 그냥 지나쳤을 마트 앞 매대도 오늘따라 흥미로웠다.


'오늘 딸기 값은 좀 더 내렸나?'

'이 집 사과는 유난히 빛깔이 좋네.'

'오이가 싼대?'


장바구니 물가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새로 생긴 가게의 간판을 눈여겨보며 동네의 변화를 읽어 내려갔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들이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 덕분에 마치 정성껏 차려진 전시회처럼 다가왔다.

골목 모퉁이를 돌 무렵 길가에 소박하게 채소를 펼쳐놓고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애기엄마, 싸게 줄 테니 와서 보고 가."

나를 부르는 그 정겨운 손짓에 이끌리듯 할머니 앞에 멈춰 섰다.

사실 채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깊게 파인 얼굴의 주름과 고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듯한

할머니의 마디 굵은 손이었다.

그 손을 보고 있자니 멀리 계신 친정엄마 생각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할머니가 정성스레 다듬어 놓은 채소들은 하나같이 싱싱하고 빛깔이 고왔다.

이것저것 고르는 내 손길을 보시더니 할머니는

"오늘 애기엄마가 첫 손님이라 기분이 좋다"며 검은 비닐봉지가 터질 듯 덤을 쑥 집어넣어 주셨다.

"이거 가져가서 맛있게 무쳐 먹어."


툭 던지는 그 한마디에 묻어나는 투박한 진심이 마치 친정엄마의 잔소리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 손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은 아메리카노를

다른 한 손에는 묵직한 정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쌀쌀했던 아침 공기는 어느덧 포근하게 변해 있었다.


오늘 내가 100원으로 산 것은 단순히 커피 한 잔이 아니었다.

도시의 아침이 주는 다정한 위로였고 타인의 삶을 긍정하게 되는 짧지만 소중한 여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에게서 채소를 산 게 아니라 세상의 온기를 나누고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묵직한 비닐봉지를 흔들며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한번 느낀다.

세상은 여전히 다정하고 우리는 그 온기를 징검다리 삼아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