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도 대화가 되는 순간
도서관의 서늘한 정적 속에 파묻혀 책장을 넘기던 중이었다.
고요한 공기를 깨고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화면 위로 떠오른 문장은
“점심 같이 먹을까?”라는 담백한 물음표 하나.
가끔은 계획된 약속보다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다정함이 더 큰 해방감을 주곤 한다.
나는 읽던 페이지에다 책갈피를 살짝 끼워두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배부른 점심 식사를 마치고 손에 든 커피 한 잔의 온기는 딱 기분 좋을 정도였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투명했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운 햇살은 어깨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았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는 걷기에 더없이 완벽했다.
마치 온 세상이 우리 두 사람의 산책을 응원하며 모든 조건을 맞춰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익숙한 산책로에는 평소 자주 마주치던 길고양이가 햇살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형형색색의 얼굴을 내밀며 만발해 있었다.
우리는 그 풍경 속을 나란히 걸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창한 고민부터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까지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웃음이 터질 때면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치거나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아이처럼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야기가 끊기고 잠잠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공백을 메우려 애쓰지 않았다.
어색함이 끼어들 틈 없는 편안하고 투명한 침묵
그 정적조차 우리의 대화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꾸며낸 말이 없어도 서로의 민낯과 구멍 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어도 괜찮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생의 커다란 축복이다.
살다 보면 나의 민낯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특히 학창 시절의 순수함을 지나 계산과 배려가 섞인 사회에서 만난 인연이라면 더욱 그렇다.
서로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닮은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생의 커다란 축복일지도 모른다.
따스한 볕 아래 마음의 무장을 해제한 채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존재.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나의 하루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헤어지는 길 등 뒤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서로의 마음속 온도를 기꺼이 맞출 수 있는 사람.
이렇게 고운 결을 가진 이와 함께라면 앞으로 마주할 삶의 어떤 계절도 그리 춥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아니 오히려 그 계절마다의 아름다움을 함께 발견하며 든든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