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부스 안에 머문 계절
아파트 단지 한구석, 이제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공중전화 한 대가 무심결에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앞만 보고 숨 가쁘게 흘러가는 속도의 세상 속에서 나는 홀로 멈춰 서서 낡고 녹슨 그 묵묵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금속덩어리가 아니라 억지로 눌러 담아두었던 나의 그리움을 일깨우는 과거의 시공간에서 떨어진 파편 같다.
수화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주머니 속 짤랑거리는 동전을 한 움큼 쥐고 설레던 시절로 불현듯 소환된다.
그때 우리는 목소리를 나누기 위해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했다.
전화기 위에 10원짜리와 100원짜리 동전을 가지런히 쌓아두고
빨간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아쉬운 마음을 조급한 말들로 채워 넣곤 했다.
뒤로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이면 괜한 눈치가 보여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채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못내 아쉬워 줄이 없는 전화기를 찾아 동네를 몇 바퀴씩 돌기도 했다.
삐삐의 짧은 진동음에 심장이 먼저 반응해 공중전화로 달려가던 그 숨 가쁜 설렘은
이제는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처럼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교복을 입고 깔깔대며 길을 지나갈 때면 어른들은 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씀하셨다.
"참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를 그때의 우리는 알 턱이 없었다.
빳빳한 교복 칼라가 거추장스럽고 어서 빨리 어른이라는 자유의 땅에 닿고만 싶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왜 그들은 우리를 보며 그토록 아련하고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을까.
이제야 비로소 그 깊은 뜻이 체온처럼 전해진다.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돌아갈 수 없는 그 순수한 계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인생은 결국 돌고 도는 법이라
이제는 내가 그 시절 어른들의 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본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해맑음 속에서
나는 잃어버린 나의 '젊음'과 '때 묻지 않았던 마음'을 발견한다.
내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그리움과 애틋함이 교차하며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만든다.
추억은 힘이 세다.
공중전화 부스라는 작은 공간에 갇혀 있던 그 시절의 공기가 지금의 나를 다시 숨 쉬게 한다.
비록 시간은 흘러 모습은 변했으나
그때의 순수했던 내가 지금의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것만 같다.
다시 길을 나서며, 입가에 맴도는 말을 나직이 뱉어본다.
"맞아, 그때 참 좋았지. “
하지만 낡은 공중전화 부스를 뒤로하며 나는
어른들이 말하던 ‘좋을 때’란 단순히 나이가 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한순간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풍경’이였다는 것을.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붙들고 비관하기보다 그 시절이 남겨준 빛나는 기억을 양분 삼아 오늘의 나를 더 단단하게 보살펴야겠다는 다짐이 차오른다.
그때의 내가 뿌린 웃음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듯
지금 내가 걷는 이 길 또한 훗날 내가 다시 그리워할 ‘가장 예쁜 순간’이 될 것이다.
과거의 나를 안쓰러워하며 뒤돌아보기보다 이제는 그 시절 소녀의 손을 잡고 함께 현재를 걷고 싶다.
낡은 수화기를 내려놓듯 미련을 덜어내고 나니
비어버린 마음자리에 지금 이 순간의 햇살과 공기가 새롭게 들어차기 시작한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몰랐을 이 깊은 깨달음이 나의 남은 생을 더욱 향기롭게 물들일 것임을 믿는다. 인생은 돌고 돌아 다시 지금 내 앞의 찬란한 오늘로 무사히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