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인남 Mar 31. 2022

2. 수험생에서 백수가 되다.

아! 수험생은 원래 백수였지..

2. 수험생에서 백수가 되다. 아! 수험생은 원래 백수였지..

백수(白手)

1. 아무것도 끼거나 감지 아니한 손

2.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



 '이제 정말 마지막 시험.'이라고 다짐했던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이 끝났다. 4년이라는 시간, 나만 정지해있고 나 외엔 시간이 흐르던 기간. 여동생은 3년 전에 교육행정직 공무원에 합격하고 결혼을 했다. 여동생의 남편(매부)은 고등학교 교사이다. 말로만 듣던 공직자 커플의 결실을 맺어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제 퇴직준비를 하시고 있으시다. 20살부터 시작한 일이 드디어 결말을 맞는다. 더 일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서울에서 매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엄청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또 갱년기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고 있는 어머니의 옆에서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퇴직하시는 것이다. 



 일요일, 그렇다 어제 마지막 시험을 쳤다. 매번 시험마다 토요일 저녁쯤 되면 인터넷에 답안이 올라오지만 무슨 똥고집인지 나는 항상 가족들이 없는 일요일 점심에 정답을 매겼다. 아마 더 이상 떳떳한 수험생이 아니란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누가 보랴 창문까지 꽁꽁 닫아 놓고 가채점을 한다. 정답을 알리는 동그라미 소리는 경쾌하지만 오답을 알리는 작대기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손이 떨린다. 4년 정도의 불합격의 짬이 쌓이면 얼추 점수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내 가채점 점수를 확인한 후 눈에 그렁 눈물이 고였다. 고인 눈물은 이내 쏟아졌다. 눈물만 쏟아지면 시원하기라도 하겠다만, 가슴은 왜 이리 찢어질 듯 아린지. 머리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난 이때까지 뭐한 거지?', '불합격이란 걸 또 말씀드려야 해?', '내 인생 어떻게 해야 해?', '이런 날 믿어준 부모님이 너무 불쌍해.', '이따위의 삶을 사는 내가 태어난 것을 부모님은 기뻐하셨다니.' 따위의 나를 갉아먹는 생각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이른 봄의 기분 좋은 서늘함이 있는 평화로운 일요일 점심, 30살의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Photo by Greg Rosenke on Unsplash






 부모님은 젊은 시절 IMF 외환위기(1997)를 피부로 경험했던 세대다. 당시 대한민국은 누구보다 잘 나가던 은행원들이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고 남부럽지 않게 부를 쌓던 기업체의 사장들이 노숙자가 되어버리는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이었다. 그 당시 '박봉'이란 이유로 시켜줘도 안 한다고 수치당하던 공무원들은 신기하게 그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 이후 '철밥통'이라는 별명이 붙어 여러 경제위기 속에도 공무원들만큼은 흔들림 없이 생존해왔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니 부모 세대의 열망이 되었고 금세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 소망이 퍼지게 되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더 해보자."



 공무원 시험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내게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처음에 말씀드렸을 때는 "그래 4년이면 충분했다. 이제 다른 길을 찾아보자."라고 말씀하셨지만, 공무원 시험밖에 모르던 내가 정말 그만두는 모습을 보고는 뭔가 불안하셨나 보다.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서 아셨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나만큼 부모님도 내가 공부에 투자한 시간, 공부했던 지식들이 아까우셨나 보다.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마음에 나는 반항하듯 '절대로' 다시는 공부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부가 아니면 앞으로 뭘 할지 계획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 당시는 눈만 뜨면 이것으로 부모님과 싸웠다. 물론 부모님의 마음은 이해한다. 무엇보다 60살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은 30살이 넘어서 합격하더라도 꽤 괜찮은 직업이다. 매년 꾸준히 상승하는 호봉과 20년만 근무해도 연금이 나오니 말이다.(지금은 법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반면, 사기업은 50대? 짧은 곳은 40대 후반만 되면 회사에서 나올 준비를 해야 한다. 퇴직 이후를 준비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익이 없다. 그렇게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수험생이길 그만두었다. 부모님이 내게 "고집부리지 마!"라고 말씀하셨듯 이것이 내 고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난 오히려 이 수험 생활이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꼈다. 이것보다는 사기업의 미래가 더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또 수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수험에서 벗어나게, 도망가게 만들었다. 물론 나름 최대한 나와 주변을 생각한 결단이었다. 이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구직활동을 하는 실업자, 즉 백수다.




 

매거진의 이전글 1. 실패한 공무원 시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