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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언니 정예슬 Feb 27. 2022

완벽주의와 원칙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벤트

'완벽주의와 원칙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벤트를 준비하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닷새가 지났다. 그렇다. 닷새 전 이벤트가 열렸고 그날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날 아이들과 치과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같은 건물 1층에 예쁜 꽃집이 생겼다.

"와~ 이쁘다!"

"지갑을 가져왔으면 엄마 좋아하는 꽃 사드렸을 텐데..."

라며 첫째가 아쉬워했다. 집에 구피, 조개, 사슴벌레 등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많아서인지 꽃까지 관리?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괜찮다고 했다.


그날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형제끼리 안방 문 앞에서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마! 너는 들어오면 안 돼!"

"왜~ 나도 들어갈래!"

"안된다니까!"

"싫어! 열어줘!"

"저리 가~~~"

"무슨 일이야?"
내가 끼어들자 첫째 목소리가 더 커진다.

"엄마~ 오지 마세요! 안 돼~~~~~~~~~"

"알았어. 안 가. 그런데 동생은 들여보내 줘."

"아휴. 알겠어요. 임00, 너 이거 하나도 만지면 안 된다!! 엄마, 절대 절대 들어오지 마세요!! 이벤트 준비 중이란 말이에요! 으아~~~~~~~~"

자기가 이벤트라는 단어를 말하고는 깜짝 놀라 소리 지르고 난리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라고 뭔가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작년에도 안방 바닥에 축하 편지를 놔두었던 기억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첫째는 후로도 한참을 뽀시락거리고 들락거리더니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문을 야무지게 닫아두고는 동생이랑 거실에서 놀기 시작했다.


때마침 남편이 케이크를 사들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노느라 정신이 없고, 나도 청소기를 돌리느라 이벤트에 관한 언질을 하지 못했다. 안방 들어간 남편이 "와~~ 이게 뭐야~~"라고 말하는 순간 아차 싶어 달려갔다. 이미 봐버렸고, 나도 옆에서 같이 보면 괜찮겠지 싶어서 "00아~ 아빠 왔으니까 엄마랑 같이 볼게. 우와~ 멋지다~" 라며 편지를 집어 보려고 하는데 첫째가 달려왔다.

"안돼~~~~ 망했어!!!!!!!"

"왜~~ 뭐가~~~"

"다 봤잖아!!!!!!!!!!"

"엄마 아빠 보라고 해 둔 거 아니야?!?!?!"

"아니야~~ 아직 아니라고요!!"

다시 보니, 옆에 LED양초 3개 불이 꺼져 있다.

"아... 그럼 더 준비해. 조금 있다 들어올게."


남편은 후다닥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나도 서둘러 방문을 닫아주었다. 한참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없어서 둘째를 들여보냈는데 "엄마~~~ 형아가 편지 다 찢었어요~~~~"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나랑 남편이 놀라서 뛰어 들어갔다.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침대 위에 뒹굴고 첫째는 도끼눈을 한 체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왜 그래?!?"

"다 봤으니까 볼 필요 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보려고 하는데 네가 들어와서 편지 못 읽었어~"

"다 봤어!!! 망했어. 엉어어ㅓ어어ㅓ엉"

"엄마 아빠 보여 주려고 한 거 아니야?"

"내가 보여주려고 했는데 먼저 봤잖아요!!!"





아..... 나는 남편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원칙주의자"

남편은 매사 자기가 정한 원칙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힘들어한다. 가족끼리 거제 여행 중에 진주에 사는 고향 친구가 아이를 데리고 잠시 합류하게 되었다. 원래는 가족끼리 미리 예약해 둔 곳에서 우리끼리 점심을 먹고 친구랑 해수욕장에서 만나 논 다음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친구가 점심 먹는 곳에 바로 오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맛집이라 예약 손님만 받는다고 친구가 오기 전부터 우려를 표했다. 따로 테이블 없이 의자만 갖다 놓고 먹으면 안 되냐고 물어만 보자고 해도 벌써 얼굴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테이블을 붙여줄 수 있으며 두 명 더 느는 건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모든 일정은 조금씩 어긋났고 저녁에는 급기야 남편 혼자 호텔방에 박혀 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남편도 한 마디 거들었다.

"완벽주의자도 있잖아..."

맞다. 완벽주의도 있었지. 나는 이벤트를 준비할 때 대충 하길 싫어해서 가랜드나 풍선 위치 하나도 다시 잡곤 했다. 식탁 위 음식들도 흐트러지는 걸 싫어했고 완벽한 사진을 위해 1mm라도 고치고 또 고쳤다.

"그래.. 누굴 닮았겠어.."

그날 계획했던 순서도 상차림도 모두 잊고 그냥 되는대로 먹고 사진도 생략했다. 그 와중에 저녁 안 먹겠다며 방문 뒤에 쪼그리고 앉아 계속 울고 있는 아들 때문에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아들을 너무도 잘 아는 남편은? 케이크 먹으러 올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정말 케이크를 꺼내자 배시시 웃으며 첫째가 나왔다. 기분이 좋아진 거 같길래 축하 노래라도 부르라고 했더니 자기가 사진을 찍겠단다. 그 와중에 완벽주의자가 완벽한 동영상 촬영을 위해 각도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고, 결국 아들의 2차 삐짐이 시작되어 방에 틀어 박혔다. 어휴. 이게 머선일이야 정말...


10분 뒤에 나올 거라는 남편 말대로 첫째는 케이크를 먹으러 나왔다. 아직은 어려서 괜찮지만, 이 상태로 더 크면 하루 종일 말도 안 하고 고집을 피우겠지 싶어 아찔했다. 무엇보다 "다 망쳤어. 망했어!"를 연발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옆에서 계속 보는 게 더 괴로웠다. 이보다 더한 일도 앞으로 무수히 많을 텐데...


완벽주의자에게 이런 조건 없는 사랑과 존중을 계속 전달해 주는 것,
그가 아주 완벽하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받으며,
그의 가치는 실수하지 않는 완벽함에 달린 것이 아님을
계속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를 완벽주의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완벽주의에 작별을 고하다>, 코넬리아 마크, 토기장이, 131쪽


"괜찮아 아들! 엄마 아빠는 네가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것 자체로 고마워. 편지에 꽃을 못 사줘서 대신 예쁜 꽃을 많이 그려 넣었다는 것도 감동이고. 충분히 기뻐~"


다음날 아침까지 삐져 있던 아들을 위해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이 날을 계기로 남편과 나는 원칙과 완벽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니... 왜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드는지...

돌려내~ 내 결기~~~

22년 2월 22일은 정말 잊지 못할 결혼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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