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파도 앞에서 부르는 이름, 엄마

by 정예슬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당장 옆에 안계시기에 아빠의 부재만이 크게 느껴졌고 애달팠다.

세월이 지나면 그 마음이 작아질 법도 한데, 아이들이 자랄 때마다 고스란히 따라서 커졌다.

사촌 동생들뿐 아니라 지나가는 아이마저도 예뻐하셨던 아빠가 본인의 손주들 커가는 걸 못 보고 가신 게 한스러워서.


성당에서 치른 내 결혼식 사진을 보면 마냥 성스럽지만은 않다.

신부 측에 고운 한복을 입은 엄마와 숙모, 고모들 모두 눈물을 훔치느라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신다.

앞만 보고 있어 몰랐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며 알았다.

신혼집에 놀러 와서 결혼식 앨범을 함께 보던 아가씨가 "장례식장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나는 안다.

모두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는 것을.


종종, 스무 살 타향살이에 아빠가 기숙사로 보내신 눈물 자욱 드리운 편지를 꺼내 읽는다.

딸에게 아침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주시고 "공주야, 딸아, 슬아" 다정하게 불러주셨던 아빠.

세상에 이렇게 다정한 아빠가 또 있을까. 아빠만이 온전한 내 편이라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요즘 꿈에도 잘 나오지 않는 아빠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늘 남아 있는 식구들의 힘듦을 당연하게 여겼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비교하노라면 그저 이 세상에 없는 사람만이 안타깝고 불쌍한 거 아니냐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쓰러지셨다.

그리고 문득, 이 책이 그리고 한 문장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삶엔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 한순간도 없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 , 이금이


마흔다섯에 난소암을 발견해 항암 치료를 받고

마지막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남편이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흔여섯 대학생 남매 둘과 홀로 된 여인.

그게 바로 나의 엄마다.


마흔이 그리 멀지 않은 나이라 그런지

그 시절의 엄마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엄마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 일제 강점기의 비극에서 벗어나

희망을 품고 새 섬으로 떠난 하와이 이민 1세대와 사진결혼을 한 소녀들.

나이가 들고 하와이 엄마들이 된 그녀들의 삶이 사무치게 슬펐는데,

이제와 나의 엄마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 남해에서 진주로, 본인뿐 아니라 오빠와 동생들의 도시락을 싸가며 학교를 다녔던 엄마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농사철이 되면 혼자 공부도 못하고 내려가 일손을 도왔다.

엄마는 K-장녀로 한평생 고생하셨고 그런 본인이 안타까워 기어코 대학교에 가셨다고 한다.

간호사가 멋져 보여서 학교 양호실과 보건소를 거들떠보지 않으셨던 게 지금 보니 많이 아쉬운 일이지만.

결혼하고 사업체를 꾸리시느라 써먹지도 못한 간호사 자격증을

서울에 올라와 두 아이를 건사하시며 요양병원에서 써먹기 시작하셨다.

경력이 없으니 나이트 근무를 하며 일을 배워야 했던 세월들.


그렇게 차곡차곡 엄마는 경력을 쌓으셨고 수간호사가 되셨다.

책임감이 강한 엄마는, 새로 옮긴 병원에 주말도 없이 일을 하러 나가셨다.

본인 환갑잔치에도 점심 드시자마자 출근하러 가실 정도였으니.

새벽바람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셨다고 한다.

과로가 쌓여 결국 쓰러지셨다.


엄마의 실신도 마음이 아팠지만,

그동안 엄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게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응급 환자가 들어와서 베드 2개를 치운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쓰러질 때 뒤에 뭐라도 있었다면 뇌출혈로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다는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 내가 복직해서 생활비 보태드릴 테니 이제 좀 쉬세요."


생각해보면 늘 나는

인생의 파도 앞에서 엄마를 불러왔고,

엄마는 언제나 기쁘게 응해주셨다.

이제는 엄마가 나를 부를 수 있게,

기꺼이 내 앞의 파도를 스스로 그리고 담담히 넘어서겠다.



ⓒ Dimitrisvetsikas1969,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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