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제일 좋았던 날은 책이 도착하는 날들이었다.“
ㅡ 소설가 도리스 레싱
집에 책이 도착한 날은 온종일 설렌다. 오롯이 책만 읽으며 살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자라서 엄마를 찾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온종일 책만 읽을 순 없는 노릇이다. 네 식구 먹고사는 데 설거지와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들은 어쩜 이리도 늘 새로이 쌓이는지.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과 집안일을 비교한 표현이 그리 과장된 것 같지 않다. 다행히도 요즘의 나는 "오늘은 여기까지만!"을 외치며 집안일을 멈추는 데 조금 익숙해졌다. 설거지가 쌓이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좀 굴러다닌다고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신 책 한 권을 빼들고 내 자리로 간다.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신기하게도 잘 놀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내 곁에 몰려드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첫째가 둘째에게 책을 읽어주며 둘이 히히덕거리기도 하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엄마가 읽어주는 책이 제일 재미있나 보다. 결국엔 ”엄마, 이 책 좀 읽어주세요."하며 달라붙고야 마니까.
예전에는 아이들의 그림책을 의무적으로 읽어주었다. 책을 많이 읽어주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어야 두뇌가 발달한다기에 목이 쉬어라 읽어준 것이다. 그때마다 빨리, 더 많이 읽어주기 바빴고 아이의 반응을 살피는 데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철저히 그림책과 엄마인 나 사이에 벽을 두었던 것 같다. 그림책이라는 건 오직 아이들을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즘은 어른을 위한 그림책도 있고, 그림책 관련 모임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내 삶과 연결짓지 못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식. 그런 내 마음에 그림책이 들어왔다. 내 삶에 깊은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책이 내 마음에 들어오기까지
「슈퍼 거북」에서 거북이 '꾸물이'와의 달리기 경주에서 진 토끼 '재빨라'의 이야기를 담은 후속작 「슈퍼 토끼」가 나왔다. 재빨라는 생각지 못한 패배에 구경꾼들을 붙잡고 이런저런 변명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온통 꾸물이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 그 누구도 재빨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재빨라는 애써 괜찮은 척해보지만 달리기의 ‘달’ 자만 들려도 자신을 흉보는 말인가 싶어 움찔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몹시 지친 재빨라는 다시는 달리기 따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집에 틀어박혀 뛰지 않는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창에 비친 병든 토끼가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된 재빨라는 무척 놀라며 병원을 향한다. 그 길에서 우연히 달리기 대회에 휩쓸리고 마는데... 오랜만에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달리고 또 달린 재빨라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내뱉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누가 뭐래도 역시 토끼는 달려야 한다니까!“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처럼 자신이 가장 자신 있다고 여겼던 일에서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대체로 실수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길고 긴 육아 터널 속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때가 있었다. 아이가 울거나 아픈 것이 꼭 엄마인 내 탓인 것만 같았고, 아이를 두고 일을 하러 나갈 때는 못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일었다. 만 3세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데, 나는 육아를 견디지 못하고 도피성 복직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명색이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게 아이를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날도 많았다.
토끼의 마지막 대사를 읽으며 그 모든 실수와 실패의 나날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실패해도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안되면 또 하면 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해도 나는 스스로에게 그러지 말자. 그동안 애 많이 썼다.' 하며 도닥여줄 수 있었다. 나의 복직을 도피로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나의 삶을 응원한다. 워킹맘은 워킹맘대로 전업맘은 전업맘대로. 그 모든 삶을 응원하기로 한다. 내가 어떤 삶을 살든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고, 잘 자라고 있다.
그렇게 나를 위로하자 용기가 생겼다. 더 이상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래도 달리는 토끼처럼, 누가 뭐래도 읽고 쓰는 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네가 무슨 글을 쓴다고." "그렇게 책만 읽으면 애는 언제 보니?" "애 밥은 제대로 챙겨주니?" 따위의 말들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땅히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아이들을 위해 쓰인 그림책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울림과 조언을 얻게 되다니! 예전과 달리 내 마음 깊숙이 그림책이 콕콕 박히는 느낌이 참 묘하다. <본깨적>이라는 책에서 "100권의 책을 읽어도 인생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단 10권의 책만으로도 인생이 크게 변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꼭 내 얘기 같았다. 그동안 수백 권의 그림책을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나에게 그림책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계속해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삶에의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책 속에서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것들을 찾아내고 적용하기 때문에 인생이 변할 수 있다. 책 속의 그림 하나, 색상 하나, 짧은 글 하나마다 깊은 뜻이 숨어 있어 마구 넘길 수가 없다. 이 느낌들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브런치 매거진 '그림책이 내 마음에 들어온 날'을 펴보기로 한다. 매일매일 그림책을 소개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고 싶다. 그림책이 새롭게 읽히며 마음 깊이 들어오는 경험, 인생이 변하는 기적을 함께 맞이했으면 좋겠다.
+ 지난번에 올린 내용을 모르고 삭제하는 바람에 다시 올립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