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굴 속으로
월요일 외래, 화요일~목요일 입원과 검사, 수술 전 준비까지 휘리릭 진행되었다. 글을 쓸 새도 없었다. 선택을 번복할 여유도 없었다. 이 추진력은 어디서 왔을까. 교수의 슈퍼파워일까. 우주의 기운일까. 기도의 힘일까. 수술을 선택하는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오롯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잘 될 거란 믿음으로. 내 몸을 믿고 가는 것뿐이었다.
아침 8시, 첫 타임 수술이었다. 오전 7시, 병실에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상에 누운 채로 수술 준비실로 옮겨졌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두 명 옆에 놓였고, 그 뒤로 20개의 침상이 차례로 쭉 줄 세워졌다. 시작 15분 전. 대기실에서 강하게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상상으로는 이미 여러 차례 나갔다 돌아왔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온갖 망상이 이어졌다. 두 눈을 감고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려고 애썼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를 반복했다.
‘아, 내가 지금 뛰쳐나가고 싶구나. 이 교수님에 대한 신뢰가 있구나. 후회되는구나. 두렵구나. 아쉽구나. 미련이 남았구나. 내 결정을 온전히 신뢰하는구나. 그래, 그렇구나’
"김민정 환자분, 수술실로 이동하겠습니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수술방에 도착했을 때 내게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나의 암세포들아
너희가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서 미안해.
나는 짧지만 그동안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
이제 좋은 곳에서 편히 쉬렴.
사랑한다.
암 선배들 말이 맞았다. 눈을 뜨니 다시 수술 대기실이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는 말에 안도하기를 잠깐이었다. 수술 중 목에 꽂은 주사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유사시 수혈을 하기 위해 확보해 둔 혈관이었다. 굵고 긴 바늘로 목 전체가 뻐근했다. 왼쪽 배에는 혹이 달려 있었다. 피 주머니라고 불리는 배액관이었다. 배액관은 금방 피로 가득 찼다. 순식간에 차는 바람에 간호사 호출을 빈번히 해야만 했다. 배는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배에 구멍을 뚫고, 가스를 넣고, 자르고, 꿰매고, 지지고 했으니 아픈 것은 당연했다. 방귀가 나오기 직전 직장 전체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연속되었다.
등 전체도 끊어질 듯 욱신거렸다. 수술 중 거의 거꾸로 매달려 있다시피 해서 허리 통증이 생길 수 있다 했다. 바른 자세로 누우면 딱딱한 침상에 꼬리뼈가 눌렸다. 오른쪽 목에 꽂힌 주삿바늘과 왼쪽 피주머니로 옆으로 누울 수도 없었다. 파란색 진통제 투약 버튼을 눌렀다. '딩동' 버튼 누름과 함께 두통이 찾아왔다. 진통제 부작용이었다. 견디고 버티다 지쳐 잠들었다. 진짜 통증은 따로 있었다. 쓰라림이었다. 아랫배와 허벅지 안쪽이 화상 입은 듯 환자복이 스치기만 해도 쓰라렸다. 동시에 감각이 없었다. 만져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아차 싶었다.
'내가 수술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그렇다던데 나는 앉는 것도 힘들었다. 걷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간신히 폴대를 붙잡고 겨우 일어나 한 걸음 뗄 수 있게 되어 병동 복도를 1/3 정도 걸었다. 병실로 돌아오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내가 무리했구나. 걸어야 회복이 빠르다는 이야기에 욕심을 부렸구나.' 그리곤 곧장 이어지는 열기운에 잠시 또 앓았다.
다행히 출혈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헤모글로빈 수치는 8.5였다. 수혈 대신 철분제를 맞기로 했다. 폴대 없이도 일어설 수 있었다. 걸을 수도 있었다. 복부 통증도 진통제 없어도 될 정도로 줄었다. 시간이 약이었다. 수술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진짜 문제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소변이었다. 자가 소변이 원활하지 않았다. 물을 많이 마셔도 소변이 마렵지 않았다. 소변이 다 나온 것 같은데 잔뇨가 한참 남아 있었다. 자궁과 방광이 워낙 가깝다 보니 자궁수술 중 방광으로 이어진 신경이 건드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4시간에 한 번씩 인위적으로 잔뇨를 빼내기 위해 간호사실로 가야 했다. 새벽 2시, 새벽 6시에도 소변통을 들고 간호사실로 향했다. 진료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간호사는 요도를 소독하고 주황색 카테터를 요도 입구에 넣어 잔뇨를 빼고 양을 체크했다. 기준점은 100ml 이하였다. 나의 잔뇨량은 150ml, 200ml를 넘기기 부지기수였다. 적게 나올 때도 있었지만 불안정하게 널뛰기를 했다. 결국 간호사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잔뇨를 빼낼 수 있도록 자가도뇨 교육을 받고 퇴원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이게 무슨 말이야, 방귀야.'
5월 5일 어린이날 퇴원했다. 열흘 만이었다.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시트 열선 버튼을 눌렀다. 아지랑이 같은 모양 3개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나의 해방을 축하한다는 듯.
덜.. 덜... 덜컹. 쿵. 덕. 쿵.
또 다른 축하가 이어졌다. 울퉁불퉁한 도로 지면이 복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은 덜컹거림에도 내 우주가 흔들렸다. 자동차 조수석을 최대한 뒤로 눕혀 온몸을 밀착했다. 차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참고 또 참으며 집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자가도뇨를 하려고 자세를 잡고 거울을 비췄다. 요도가 보이지 않았다. 거울 각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른 외음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요도, 질 입구 모두를 가렸다.
'설마, 내게 고환이 생긴 건가??? 나 이제 31인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어...'
인생 최대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엄마에게 SOS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리 간호사인 엄마도 전화로는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요도를 찾지 못해 자가 도뇨를 실패했다.
'단순 림프부종 일까. 수술 후엔 그럴 수 있다는 말에 내가 방치한 것은 아닐까. 설마 되돌아오기 어려운 단계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아랫배와 허벅지 쓰라려서 속옷을 입을 수 없었다. 붓기도 점점 심해져 배가 딱딱해졌다. 몸 통증보다도 밀려오는 두려움에 마음이 움츠려 들었다. 몸과 마음은 하나였다.
가족들의 관심, 안부, 질문도 몹시 괴로웠다. 듣기도 싫고 답하기는 더욱 싫었다. 나를 괴롭게 하려던 의도는 없었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를 위한 질문인가? 나의 증상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인가? 각자의 궁금증, 두려움과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것은 아닌가?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저 미안함에, 미안함을 느끼게 만든 상황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인들에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가족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