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 CT실에서 사랑을 고백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by 치유의 하루

하늘은 맑고 햇살을 따스했다. 전날만 해도 가득했던 미세먼지는 사라졌다. 영원할 것 같았던 뿌연 하늘은 온데간데없었다. 하늘이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하고 있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퇴원 5일 차, 몸상태는 달라지고 있었다. 내 몸은 나의 치유를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이 고통이 영원할 거란 생각은 나의 망상이었다. 그 어떤 증상도 수술로 인한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아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의 치유력을 믿기에, 다 잘 될 것임을 알기에.



괜찮긴 뭐가 괜찮아


지나고 보니 내 수술은 간단하지 않았다. 같은 암종이라도 서로의 수술 범위, 방식, 회복 기간 등이 모두 상이했다. 내가 받은 수술은 복강경 광범위 자궁적출술이었다. 배꼽을 포함해 4군데 구멍을 뚫는다고 했다. 우선 경부를 포함한 자궁 전체를 드러낸다. 골반 주변 감시림프절도 몇 가닥 함께 떼어낸다. 림프절 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림프절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면 기수는 곧장 3기로 변한다.


수술 방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온전히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도 내 나이가 젊은 편이니 난소는 살려두기로 했다. 대신 추후 방사선 치료 가능성을 고려해 난소의 위치를 갈비뼈 아래 부근으로 올려 고정하겠다 했다. 그리고 나는 수술을 하는 김에 오른 난소에 있던 기형종 제거를 부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왼쪽 두 군데, 배꼽과 그 아래 한 곳, 그리고 오른쪽 기다란 자국까지. 총 다섯 곳에 상처가 보였다. 그중 오른 난소 부근의 자국은 꽤 길었다. 나는 피부로 드러나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안쪽은 바깥쪽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었을 테니. 그제야 내가 받은 수술이 단순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내 뱃속의 남은 장기들은 혼란스러움을 온몸으로 내게 전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개뿔.'





장담할 수 없지만, 다행입니다


수술 후 보름이 지나고 외래 진료실로 향했다. 수술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내진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타닥타닥. 마우스 스크롤이 급하게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제발…”


그의 간절함이 두 평 남짓한 진료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수술로 떼어낸 조직 검사 결과 암세포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항암, 방사선 치료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향후 2년간은 3개월 주기로 검진을 받기로 했다. 그의 눈빛에서 안도감을, 목소리에서 긴장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덩달아 나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제야 나는 수술 후 겪고 있던 문제들을 꺼냈다. 교수는 그럴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소변 문제만 빼놓고서.


"교수님, 소변은 언제쯤 돌아올까요? 돌아오긴 하는 건가요?"


"환자분, 그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3개월, 6개월, 1년...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릅니다. 돌아온다는 것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솔직했다. 그랬다. 교수가 해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내게 한 보따리 약을 처방해주는 것밖에. 기능이 되돌아올 때까지 방광이 무리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밖에. 그의 소견은 내게 앞으로 평생 자기 소변을 볼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수술을 선택했던가. 마냥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날이었다. 왼손에는 처방전을, 오른손에는 3개월 후 외래일정 예약 안내서를 들고 나왔다.





당연한 것은 없다


자가 소변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은 외출과 이동의 제약을 의미했다. 4시간에 한 번은 인위적으로 소변을 배출해야 했다. 청결이 가장 중요했다. 도뇨 전후로 소독 절차는 필수였다. 방광은 약해져 있었고, 요관도 얇아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적절한 신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혹여나 소변을 참는 일은 금물이었다. 방광이 풍선처럼 부푼 상태가 반복되면 방광이 지쳐서 전처럼 줄어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변이 제때 배출되지 않거나 잔뇨가 남으면 소변 색이 바로 흙탕물처럼 탁해지고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소변을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몇 번을 보는지, 소변 간 시간 차는 얼마나 되는지, 색상과 냄새는 어떤지 말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동하던 기능이기에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당신은 왜 못 가진 것을 애써서 찾는 건가요?


내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걸음수는 2 천보 남짓이었다. 시간으로는 30분 정도였다. 집 앞 공원을 향했다가 입구만 찍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 번은 100m 더 걸었다가 하마터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뻔했다.


초여름이었다. 주말 아침에 남편과 함께 공원으로 향했다. 짧은 바지, 크롭탑을 입고 나온 사람들, 웃으며 사진 찍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부, 뛰어다니는 아이들까지. 내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었다. 전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만 보였다. 이제 나는 누릴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나는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울음이 터지니 걷는 것도 힘이 붙여 멈춰 섰다. 남편도 나를 보고 멈춰 섰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당신은 왜 가진 것을 보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애써서 찾는 건가요?



그 순간 맨 밑바닥에 발이 닿았다. 무릎이 굽혀져 쪼그려 앉은 자세가 되었고, 순식간에 무릎을 펴고 뛰어올랐다. 찰나였다.





응급 CT실에서 사랑을 고백하다


목요일 오후였다. 계속되는 고온, 옆구리 통증, 탁한 소변까지. 자가도뇨 교육에서 들었던 신우신염 증상이었다. 대학병원 진료과에 연락했다. 교수 외래일정은 한참 뒤라서 대신 전문의 진료일정을 잡아주었다. 그전에 너무 급하면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우선 동네 비뇨기과에서 항생 주사를 맞았다. 그제야 열 기운이 조금 떨어졌다. 다음날 전문의 진료에서 그녀는 나의 상태를 묻고 내가 복용 중인 약을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를 수술한 교수였다. 통화가 끝나자 응급 CT 처방을 내렸다.


“환자분, 지금 바로 응급실로 가세요. 응급 CT를 찍어봅시다.”


밤 9시 응급실 CT실 앞은 조용했다. 나와 남편뿐이었다.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조차 없었다. 벽에 달린 소리 없는 TV에는 교통사고 피해자 가족들이 나왔다. 피해자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날을 회고하며 서로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함께였을 때 사랑한다고 더 말해줄걸 그랬어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남편과 나는 마주 봤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 한다고.




14835998-BCA8-42C8-A447-BC253322787F.JPG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