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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의 하루 Dec 03. 2023

당신의 영혼이 하얗게, 보드랍게, 달콤하게 채워지기를

소울을 채우는 살림

한국인의 소울푸드라고 불리는 음식이 있다. 빨간 양념 사이로 떡과 어묵이 스치듯 지나간다. 말랑말랑한 떡 표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 때까지 졸여준다. 대파와 사리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혹시 빨간 양념이라는 단어에 이미 짐작해 버렸는가? 그렇다. 바로 떡볶이다.


몇 년 전에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제목의 책까지 나왔다. (해당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은 알지 못한다. 그저 제목 글자만 눈에 띄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판매되는 떡볶이만 리뷰하는 유튜브 채널도 있다. 남녀노소, 나이불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이 몇 가지나 될까. 쫀득쫀득 쌀떡파와 탱탱 밀떡파의 팽팽한 구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치아에 눌어붙는 떡 식감이 외국인들에겐 익숙하지 않다 해도, 머지않아 K-푸드의 선두에는 떡볶이가 서있을 거라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우리에겐 쌀떡 못지않게 맛있는 밀떡 옵션도 있으니 말이다.


사는 지역은 달라도 어렸을 적 학교 앞에서 먹었던 떡볶이 맛을 비슷하게 기억한다니 신기할 노릇이다. 떡볶이집에서 해줘야 하는 국룰도 하나 있다. 오백 원짜리 컵 떡볶이, 이천 원짜리 떡볶이 한 그릇이 채워지는 사이 종이컵을 뽑아 들고 어묵 국물 앞으로 향하는 것. 떡볶이 판 바닥이 드러난 것은 봤어도, 어묵 국물 통이 비워진 것을 본 기억은 없다. 이 역시 전 국민이 똑같이 기억하는 맛이라는 사실에 웃음이 난다. 우리는 마치 간판 없는 프랜차이즈점에 다녔던 것만 같다. 학창 시절 얼마를 주고 떡볶이를 사 먹었는지 물으면 세대가 금방 탄로 난다는데, 요즘은 학교 앞 떡볶이 집을 보기 힘들다. 즉석 떡볶이와 라면, 볶음밥까지 한번에 맛볼 수 있거나, 한 통에 가득 담아 배달 판매하는 브랜드들이 눈에 띌 뿐이다. 뒷자리 0이 하나 더 붙은 가격과 함께.


떡볶이 양념 종류도 다양해졌다. 짜장, 크림, 불닭, 로제, 마라 떡볶이까지 쉴 새 없이 나온다. 그러나 유행은 오래가지 않으며,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빨간 양념 떡볶이로 돌아온다. 고춧가루 또는 고추장으로 매콤한 맛과 색을 내고, 설탕과 조미료를 듬뿍 넣어 완성시킨 떡볶이다. 매콤하니 스트레스가 풀리는 맛이다.




그러나 이젠 떡볶이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몇 년 전 암을 진단받고 살림이 180도 바뀌었다. 그중 식사는 제일 먼저 마주하는 고민이자, 그나마 쉬운 과제였다. 전업치병을 하는 시절 동안 음식만큼은 철저히 따져가며 입에 넣었다. 무엇을 먹느냐 보다,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가 우선이었다. 음식재료를 공부하며 나에게 맞는 계획과 기준을 세웠다. 현미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며 두부를 제외한 가공식품은 전부 끊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음식 중 99%는 금지한 식품 범주에 속했다. 우리 부부가 주말이면 즐겨 만들어 먹던 떡볶이 역시 그리운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떡볶이 한 입만' 같은 소리가 나올 구멍은 없었다. 그만큼 진심으로 절박한 시절이었다.


혹시나 먹을 만한 제품이 있을까 하여 온갖 떡볶이를 다 찾아보았으나,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홍보하는 떡볶이는 '덜 달게, 조미료를 덜 넣어서' 만들었을 뿐이었다. 진짜 건강한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밀떡은 직접 뽑은 100% 현미쌀떡으로 대체했다. 어묵 대신 버섯을 넣어 씹는 식감을 더했다. 양배추, 당근, 양파, 대파를 듬뿍 넣어 끓였다.


'이건 그냥 떡야채볶음탕이잖아?'


집에서라도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높은 문턱이 연속되었다. 치병 초기에는 무염식까지 했었고, 심지어 고추 같은 자극적인 재료도 섭취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100% 신생아 모드였다. 떡볶이 먹는 신생아는 상상불가인 것처럼, 떡볶이 먹는 내 모습 역시 그려지지 않았다. 염분과 고춧가루는 없다 해도, 단맛과 감칠맛은 어떻게 낸단 말인가.


"내가 만들어 볼게요."


떡볶이를 그리워하는 아내를 두고 남편이 나서주었다. 그는 알통만 한 무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왼손으로 채칼을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무를 잡아 쓱쓱 밀고 당겼다. 장비 덕분에 일정한 크기는 물론 빠른 속도로 썰었다. 수북이 쌓인 무 속은 새하얗고 촉촉하게 빛났다. 그는 채 썬 무와 양파를 먼저 끓여 수분과 함께 단맛을 뽑아내었다. 그다음에 떡을 넣고 익혀주었다. 먹기 전에 들깨 가루를 뿌리면 끝이었다.


투명해진 양파와 단단함을 잃어버린 무가 누르스름한 현미떡과 들깨 가루 옆에 있으니 유독 하얗게 보였다. 들깨 가루를 섞으며 떡볶이 국물이 약간 걸쭉해져 흡사 크림 뇨끼 파스타 요리 같았다. 아기 궁둥이처럼 아주 보드랍고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간장이나 소금 간을 더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충분했다. 채소가 지닌 단맛과 들깨 가루의 고소함은 두 눈이 떠지는 맛이었다. 한 그릇 먹고 나면 몸 전체에 따뜻함이 맴돌았다. 게다가 먹고 나면 속이 편안했다. 제철 가을 무는 인삼보다 좋다는 말이 있다더니 남편표 무떡볶이는 그 자체로 한 끼 식사이자 보양식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건넬 수 있는 음식이었다.




미안하지만 내 머릿속의 떡볶이는 아니네요


무염식 시기를 끝내고 무 떡볶이에 간장 한 스푼을 넣었다. 눈코입, 귓구멍을 비롯해 모공들까지 전부 깜짝 놀랐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뚫리는 듯했다. ‘너무 맛있잖아!!!’ 무염 버전보다 백만 배는 더 맛있었다. 팔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던 떡볶이 맛은 아니었다. 떡볶이를 향한 그리움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1년 넘게 고춧가루를 먹지 않았음에도 떡볶이를 상상하면 코끝이 따갑게 매워지는 듯했다. 떡볶이가 전 국민 음식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맵고 단 자극적인 맛과 그로 인해 따라오는 중독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집중치병 시기를 넘기고 최대 일주일에 한 번 치팅데이를 하기로 식이계획을 수정했다. 첫 번째로 선택한 외부 음식은 채소와 버섯을 넣어 원하는 대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즉석 떡볶이였다. 조미료 가루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히는 듯 짜릿했다. ‘어린이가 이유식을 마치고 처음 세상 음식을 맛볼 때 이런 짜릿함을 느끼는 걸까?’ 싶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지만, 속이 편하진 않았다. 맛은 분명 그리던 맛과 가까웠지만, 그 맛은 아니었다. 무떡볶이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맛이 강렬했을 뿐, 만족스럽지 않은 식사였다. 마음 어딘가 텅 비어있었다. 사람은 입으로만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기억하고 추억하는 맛은 그때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 장소, 공기와 내음까지 그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아련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바깥 떡볶이가 이따금씩 생각이 날 때면, 잠시 망설이다가 무떡볶이를 직접 해 먹곤 한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겨울철 무 맛은 무맛이 아니다. 어느 당보다도 건강하고, 어떤 조미료보다도 감칠맛이 넘치는 재료다. 소화효소 덩어리이자 원기보충 증폭제다. 우리 부부가 힘들고 절박했던 시절을 버티고 다시 살아나게 해 준 맛이다. 몸과 마음, 영혼까지 채워줄 음식이 절실하다면 자신 있게 무 떡볶이를 건네본다. 하얗게, 보드랍게, 달콤하게 당신의 영혼까지 채워주기를 바란다.




부록. 무떡볶이 만드는 법


재료

무 ½~⅓ (많이 많이)

양파 ½ 

마늘 한 줌

현미가래떡

들깨 가루

간장 (또는 소금)


방법


1. 일단 무를 채 썰어 줍니다.


2. 물을 ⅓ 정도로, 무가 잠길랑 말랑한 정도로 넣어서 중강불로 끓여줍니다. 무에서 물이 나오니 많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보. 글. 보. 글


3. 한번 끓었으면 준비해 둔 양파와 마늘을 넣고 다시 한번 끓입니다.



4. 양파가 투명해질 때쯤, 떡을 넣습니다.

저염식 또는 일반식 하시는 분들은 이때 간장을 한 스푼 넣어 밑간을 해줍니다.




5. 떡이 말랑해지면 완성입니다!


접시에 내어 후추(선택)와 들깨 가루(필수)를 뿌립니다.




"뭐야~ 이건 무 조림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무 조림에 떡 넣어서 드셔보셨나요? 안 먹어봤다면 모르는 맛입니다."



가을 제철 무가 나오는 지금이 최고의 맛을 볼 수 있는 때입니다! 자신 있게 추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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