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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의 하루 Nov 17. 2023

쭈그린 히포크라테스 수프

당신의 다짐과 관절들이 나를 살렸습니다

리드미컬이라곤 1도 없는 도마질 소리가 주방 허공을 가른다. 그는 이리 다지고 저리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진다. 토마토, 양파, 마늘, 당근, 파슬리, 브로콜리 등 크기와 색상, 모양도 제각각인 재료들을 주무르다시피 만져가며 다짐을 이어간다.


"탁. 탁탁.. 타. 악. 탁. 탁.. 탁..."


도마 건너편 벽면에 세워둔 스마트폰에서는 '따라 하기 쉬운 재료 손질법' 동영상이 재생 중이다. 한 번이라도 칼질을 줄여보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토마토에서 터져 나온 즙이 도마를 따라 흐른다. 왼쪽 손바닥과 오른손으로 잡은 칼날을 모아 토마토 즙을 쓸어 모으고 냄비에 곧장 담는다. 마치 생명수 한 방울도 버릴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캠핑용 미니 테이블과 1구 하이라이트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주방과 거실 사이 벽면에 전기 콘센트로 향했다. 테이블 자리를 잡고 그 위로 하이라이트와 올 스테인리스 냄비를 차례로 올렸다. 물 넉넉히 담아 국수 삶을 때나 쓰던 커다란 냄비였다. 하이라이트 줄 끝에 매달려 있는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다.


60도로 온도를 세팅한 뒤 나무 주걱을 들고 쭈그려 앉았다. 아주 작은 크기로 다진 채소만 넣고 별도 생수를 넣지 않았다. 약한 불에서 뭉근히 끓여 재료 자체가 지닌 수분으로 수프를 끓이는 방식이라 했다. 그는 하이라이트 근처를 맴돌며 냄비 바닥이 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저어주었다.



내 인생의 첫 히포크라테스 수프


수프는 그와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남편은 느긋한 편이었다. 성격이 급해 행동이 빨라지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수프 한 그릇이 오기까지 많은 여정을 거쳤다. 채소를 구하고, 씻고, 다듬는 일이 8할이었고, 나머지 2할은 냄비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일이었다. 다져도 다져도 끝이 없는 손질 작업이 지루할 법도 할 텐데 그는 반복되는 과정을 묵묵히 해냈다. 그의 물리적 다짐은 '반드시 건강해지겠다'는 나의 정신적 다짐으로 이어졌다.


히포크라테스 수프는 막스 거슨 식이요법에서 배웠다. 거슨은 독일계 미국 의사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에 비정규적인 요법으로 암 환자를 치료하여 성과를 거둔 의사였다. 여러 가지 동시 병행한 요법 중 하나로 히포크라테스 수프를 꼽았다. 수프는 암 진단 직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챙겨 먹은 음식이다. 토마토, 셀러리, 양파, 당근, 마늘, 파슬리를 베이스로 두고, 상황에 따라 단호박, 연근 등을 넣기도 했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랗게 된다'는 유럽 속담이 있다. 토마토의 리코펜은 워낙 유명하다. TV 건강 프로그램에도 여러 차례 나와 한 번쯤 들어본 바 있을 듯하다. 활성산소는 변성된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 관여하는데, 리코펜은 우리 몸의 유해물질인 활성산소를 제거해 준다. 십자화과 채소(양배추, 브로콜리 등)에는 비타민 C와 식이섬유가 풍부하다. 마늘의 유황화합물이 신체 해독 효소를 활성화한다. 모두 항암, 항염 성분이 가득한 채소이자, 내게는 세포 환경을 개선하는 약이었다. 부작용은 제로인 최고의 천연 항암제였다.


며칠 뒤 택배가 도착했다. 마늘을 구멍에 넣고 슬라이스를 밀면 편마늘로 썰어주는 소도구였다. 마늘과 김치와 같이 손에 배인 음식 냄새를 빼준다는 스테인리스 덩어리도 왔다. 마지막으로 가스 화구를 대체할 3구 인덕션이 배송되었다. 그의 관절이 펴지며 내는 야호 소리 속으로 하이라이트는 종적을 감추었다.


‘야~호~~’


인덕션 시대 이후로는 남편에게서 나무 주걱을 건네받았다. 그 이후로 이유식 제조기를 중고구매했는데 (이전 <카레라이스로 건강을 챙길 순 없다> 편을 참고 바람) 수프 기능도 있었다. 재료들을 전보다 크게 썰어 넣어도 버튼을 누르면, 재료를 익혀주고 믹서로 곱게 갈아주기까지 해 몹시 편리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의도한 저온조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와 나의 관절을 위하여.




지난해 우연히 S사 전기냄비를 알게 되었다. 온도와 시간 세팅은 물론, 무 수분 요리가 가능해 냄비 앞에 서서 내내 저어줄 필요가 없는 제품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암 환우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고가의 제품이라 남편과 상의해야겠다 싶었다. 여러 차례 시연에 참여해 본 뒤 그에게 구매의향을 밝혔을 때,


남편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3년 전 주방과 거실 사이에 쭈그려 앉아 히포크라테스 수프를 끓이던 시절 이미 찾아봤었단다. 그때 알았다면 바로 사자고 했을 텐데. 미안함과 고마움, 아쉬움이 교차했다. 그의 온갖 관절 보호는 물론이거니와 시간과 에너지의 절약, 영양소 파괴 최소화 등을 고려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진단 초기 2년간은 매일 주야장천 수프를 해 먹었으니 사용 횟수를 고려하면 본전을 뽑고도 남았을 텐데 싶다.


고가의 치유 도구(주열기, 녹즙기, 온열 매트)는 거침없이 구매했던 남편이었다. 그 시절 그는 오로지 나를 살리기 위한 것에만 눈과 귀와 손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먹기 전에 통 들깨를 뿌려 먹는 모습



보슬보슬 가을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이다. 나를 살린 음식을 생각하려니 결국엔 그가 살린 음식과 맞닿아 있다. 그는 목이 살짝 따끔거린다는 말을 남기고 출장을 떠났다. 떨어진 면역력 챙기는데 히포크라테스 수프만 한 것이 없다. 떠나기 전에 한 그릇 먹었으면 좋으련만 아쉽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뭉근하게 히포크라테스 수프를 끓여두어야겠다.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짧게 느껴지길.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촉촉한 수증기 너머로 외쳐본다.


"당신의 다짐이

나를

살렸습니다.


당신의 관절이,

당신이 살린 음식이

나를

살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록. 히포크라테스 수프 (최고의 천연 항암제) 만들기


재료

- 토마토 3~4개

- 마늘 5~6알

- 브로콜리

- 양파

- 셀러리

- 파슬리



요리법

1. 재료를 잘게 다져 준비한다.

2. 냄비에 넣고 약한 불로 끓인다.

3. 완성되면 믹서로 갈아먹는다.



꿀팁

1. 먹기 전에 들깨가루를 뿌린다.

토마토의 체내 흡수율을 높이고, 혈당피크를 막기 위함이기도 하다. 올리브유 또는 들기름도 좋다.


2. 후추, 계핏가루를 넣어 먹는 방법을 추천한다.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3. 최대한 씹어서 삼킨다.

믹서에 갈았다면 이미 잘게 갈려있어서 씹을 것이 거의 없지만, 최대한 침과 함께 씹어서 삼키려고 하자. 소화액이 충분히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자, 혈당피크를 방지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4. 핵심은 신선도 유지!

곱게 간 상태로 공기 중에 노출되면 빨리 산화되기 쉽다. 산화된 음식은 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들었더라도 독이 된다. 건강을 회복하고자 먹는 음식을 독으로 만들 순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먹을 만큼씩만 끓여 먹는 것.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한 번 만들 때 최대 2일 치 정도만 만들자. 혹시 양 조절을 못 해 3일 치 넘게 되었다면 냉장보단 냉동보관이 낫겠다. 오래된 음식은 아깝더라도 멀리하자. 영양분 파괴를 최소화하고 체내흡수율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서 신선도에 특별히 유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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