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듯한 더위를 느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내일이네요. 산정 특례 종료일 말이에요.”
“맞네요. 2019년 8월 광복절 공휴일 이후, 이맘때였으니까. 5년 정말 빠르네요. 고생 많았어요. 당신 기분은 어때요?”
“여보가 고생 많았죠. 기분은 그냥 그래요. 덤덤해요. 사랑해요 잘 자요.”
눈꺼풀은 무겁고 동공은 풀린 상태였지만, 어둠 속에서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이후 눈을 뜨니 휴대폰 배경화면 시계가 1로 시작한다. 13시는 아니고 10시니 아직 오전이라며, 아무도 없는 방 침대 위에 누워 소심하게 눈알을 좌우로 굴려본다. 마치 목표했던 일에 매진했다가 오랜만에 휴일을 맞이한 것처럼 늦잠을 잤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건네던 소리가 꿈인 줄 알았다. 그제야 새벽 일찍 나간 남편의 빈자리가 보인다.
설렁설렁 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나왔다. 높고 푸른 하늘 사이로 햇살이 쨍하다. 뉴스를 듣지 않아도 폭염 경보임을 알겠다. 더위가 돌아 들어간다는 처서가 코앞인데, 그도 늦잠을 자는지 처서 매직은 아직 잠잠하다. 5년 전 이맘때도 올해처럼 정말 더웠다던 지인과 대화가 생각났다. 그녀는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힘든 해를 보내서인지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남편 우리 둘은 전혀 기억이 없다. 하늘 색상도, 바람과 햇살, 찌는 듯한 폭염까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더위까지 느꼈다면 뉴스에 나왔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후 네 번의 여름을 무사히 보냈고, 이제는 타는 듯한 더위도 느끼다니! 몸과 마음의 여유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비로소 진짜 일반인이 되었음이 실감되고, 그저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다.
산정 특례가 종료를 한 달 앞두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알림이 왔다. 원래 종료일인 8월 19일에서 20일로 하루 연장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전공의 파업이 장기화되며 의료기관 진료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해당 기간을 비례계산하여 연장한 모양이다. 합리적인 대응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한 소식인데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루 차이일 뿐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게다가 누군가는 실제로 진료의 어려움을 겪었을 테다. 실제로 주변 암 환우들이 파업 영향을 받는 것을 몇 차례 목격했다. 당장 '나'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내 가족과 지인 누구에게 언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루빨리 해결되어 추가 산정특례 연장은 없길 바란다.
최근 외래 진료 중, 담당 교수에게 산정특례 연장 여부를 물었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눈이 동그래져서 안 된다고 했다. 발견된 암이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교수는 내게 "암이 있어서 연장되는 것이 좋습니까, 없어서 연장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원하기도 섭섭하기도 했다.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만, 현대 의학적으로 암 소견이 없다는 증빙이 반가웠다. 거절 당했던 입양 상담도 시작할 수 있을테다. 서류상으로도 자유로워진다는 점이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는 듯 가벼웠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먹고, 자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모든 방식이 그대로 유지될 테니 말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성을 지키고, 오늘 하루를 선물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나의 해방일지를 써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카드와 함께 보내고 싶다. 고마웠다는 말을 늦게라도 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