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유의 하루 Sep 06. 2024

영감 대신 드려요

세입자 2호 등장이요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커피를 한 잔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 이른 아침 텅 비어있는 카페는 테이블과 빈 의자, 머리 위로 흐르는 차가운 공기로 차 있었다. 텀블러에 담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야외 온천에 온 것만 같았다. 카페라테는 두유로 만든 덕에 짙은 황갈색을 띠었다.


글 주제를 퍼올리는 마중물을 더하듯, 커피 한 모금 더했다. 쫀쫀하고 부드러운 두유 거품은 입술에 닿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쇄골 주변에 경직된 어깨 근육이 가벼워졌다.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 치유활동가로 살아가는 나, 라이프코칭 코치로 낭독가로 작가로 PD로 다양한 부캐로 살아가는 나까지. 쌀쌀 고소한 커피가 자기표현 욕구를 깨운 것이 틀림없었다. 자기소개서 같은 설명글 말고 구연동화같이 빨려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스토리텔링은 무엇일까.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글 영감을 소환하는 커피 한 모금을 이어갔다. 불길한 예감은 슬로 모션으로 다가왔다.


'피요 오 오오-옹'


"오른 어깨 쇄골 끝 지점 바로 아래 명당입니다! 정면에서도 측면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군요. 도약부터 방향 속력, 동그란 문양으로 완벽한 착지까지 완벽합니다. 기술 점수, 예술 점수 모두 만점입니다!!!"


얼룩 해설 캐스터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커피 거품은 가볍게 공중 부양하여 보글보글 기품을 유지한 채 하얀색 컨버스에 폭신하게 안착했다. 피로연장에서 입장 표식 스티커를 붙여준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영감 대신 빨랫감이라니. 배신감과 동시에 글 주제를 얻은 것에 안도감도 몰려온다.



어릴 적부터 옷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분홍색 티셔츠만 있으면 완성이었다. 옷장 속은 분홍으로 도배되었고, 이따금 쇼핑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핑크 티셔츠가 손에 들려 있었다. 성인이 되어 분홍색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나를 꾸미는 일은 여전히 관심 없었다. 자신도 없었다. 멋진 패션 대신 깔끔함으로 나의 길을 정했다. 흑백 바둑판처럼 드레스룸을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사이좋게 쌓기로 했다.


심리적 비용일까. 흰옷과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뭐라도 묻을까 봐 입기도 전에 조심스러웠다. 어떨 때는 까무잡잡한 피부 톤이 부각되는 모습에 갸우뚱했다. 색 있는 옷을 자주 선택할수록 흰옷은 멀어져만 갔다. 하얀 옷을 모아 빨래하려니 하루 이틀이 더 흘렀다. 옷장에 흰옷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기 일쑤였다. 때문에 묵은 때는 더욱 거세게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얼룩 없는 옷에게 누가 텃세를 부렸나. 얼룩진 흰옷은 하나둘씩 드레스룸에서 퇴출되었다.



여러 차례 실패하고서 배운 점은 3가지다.

(1) 흰옷은 부지런한 사람들의 특권이다.

(2) 흰옷은 진짜 멋쟁이들의 색상이자, 난이도가 있는 패션이다.

(3) 하얀색도 종류가 다양하다. 나에게 잘 맞는 톤이 있다.


나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점도 3가지다.

(1) 미루기 기술이 만렙이다.

(2) 음식을 잘 흘리는 편이다.

(3) 얼룩이에서 진짜 멋쟁이로 거듭나고 싶다.


휴대전화 전면 카메라를 거울삼아 동그란 얼룩을 비추어본다. 얼룩 하나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새롭게 발견하다니 히죽히죽 웃음이 난다. 왼쪽 가슴 부분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얼룩 1호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세입자다. 이번엔 빠져나가겠지 하고 세탁해 보아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이번 얼룩의 결말은 무엇이 될까? 1호와 함께 사라질 수 있을까. 얼룩은 지워지더라도 얼루룩덜루룩한 위치는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여섯 번의 여름, 그리고 해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