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직업은 전업치병가입니다

다양한 시도, 그 뒤에 숨은 용기

by 치유의 하루

전업주부, 전업작가도 아니고 전업치병가입니다

한발 한발 나아가다


오로지 치유를 위해 24시간을 보내는 미션이었다. 잠자는 시간 8시간을 제외하면 16시간이다. 어떤가?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예상과 달리 미션 체감 난이도는 최고난도였다.


'치유의 하루를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기상 직후부터 취침 전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시간 맞춰 녹즙 챙겨 마시기, 치유식이 원칙에 맞게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준비하기, 식후 운동하기, 마음치유를 위한 명상, 힐링코드, 웃음치료, 음악치료 그리고 풍욕, 족욕, 온열 치료, 커피 관장, 주열 치료, 고용량 비타민C IVC(정맥주사), 직접 뜸을 비롯해 각종 대안치료까지 하루 스케줄이 꽉꽉 차 있었다.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진짜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냥 쉼 자체였다. 물리학의 법칙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던데. 관성의 법칙은 내게도 어김없이 작용했다. 암을 만나 인생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그간 앞을 향해 달려온 세월이 훨씬 길었으니까. 마음은 멈춤이란 사인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일하는 것이, 아무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파괴적인 삶을 살아온 것일까.



커피를 똥꼬로 마실 줄이야

보호자 남편의 용기 덕분에


치병 초기 여러 방법론을 시도할 무렵 에피소드를 하나 꺼내본다. 커피 관장 이야기다. 커피 관장은 말 그대로 장내에 커피 용액을 주입 후 비워내는 것이었다. 커피 관장은 막스 거슨 박사를 공부하다 알게 되었다. 거슨은 독일계 미국 의사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에 비정규적인 요법으로 암 환자를 치료하여 성과를 거둔 의사였다. 여러 요법 중 하나로 다량의 녹즙 음용과 커피관장이 있었다. 거슨 박사의 관장은 일반적인 관장의 목적(장세척)과는 달랐다. 다량의 녹즙 섭취로 암 환자 몸이 해독되며 독소가 쏟아지는데, 이때 간 해독을 목적으로 커피관장 요법을 병행했다고 한다.


머리로는 알겠다. 알겠는데... 커피를 똥꼬로 넣어야 한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관장 도구를 눈앞에 두고 며칠을 망설이던 때였다. 남편이 커피액을 끓여 적당한 온도로 식히더니 관장 통에 담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 누워 자리를 잡았다. 손으로 주황색 카테터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멈추었다. 이내 곧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결혼 5년 차. 우리는 관장을 튼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제야 용기를 얻었다. 뒤로 물러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보호자 남편의 용기 덕분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요?


본격적으로 치병 시작한 날부터 달력에 날짜를 세었다. 시간은 빠른 듯 느리게 흘러갔다. 일주일 되던 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열흘째 되던 날 더 이상 숫자에 연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이후론 3개월, 6개월이 훅훅 지나더니 어느새 12개월이 흘렀다.


3개월쯤 되니 현미채식과 녹즙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가스가 차고 배가 꾸르륵거리던 것도 많이 줄어 편안해졌다. 6개월쯤 되었을 땐 몸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단적인 예 손발이 많이 따뜻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가벼웠다. 얼굴에 붓기도 없어졌다. 음식 고유의 맛이 느껴졌고, 걸을 때 온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밤이 되면 잠이 쏟아졌고, 명상과 좀 더 친해졌고,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함을 표하기 시작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제2의 인생의 시작


체감상 가장 큰 변화는 식사시간이었다. 매일 하루 두세 번을 꼬박꼬박 마주하기 때문이다. 저염식을 시작으로 무염식에 이르렀다. 염분을 포함한 미네랄은 1L 넘는 녹즙으로 보완했다. 어느 암 환우 여성 보호자가 내게 말했다.


신생아로 돌아간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신생아 수유 시기가 지나면 무염으로 만든 이유식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갖은양념을 넣은 이유식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육아 경험이 없어 인지하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200% 공감되었다. 치유의 시간은 거꾸로 갔다. 다시 신생아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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