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혼자 유치원을 등원한 나
죽다가 살아온 엄마는 우리 키우기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아빠의 의처증은 날로 갈 수 록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으니 나는 결심한 대로 엄마에게 짐같은 딸이 되지 않도록 혼심의 힘을 다해야 했다. 안 그러면 엄마는 우릴 떠날 수 있으니까. 연년생 동생을 케어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한 명이 울면 연달아서 같이 울고, 한 명이 배가 고프면 같이 밥을 줘야 한다. 보통은 이런 경우에는 아빠라는 존재가 함께 육아를 하거나 부모님이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빠는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었고, 외가 식구들에게는 절대 상황을 말을 할 수 없었다. 시가 식구들은 아빠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더욱이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6살 무렵의 나였다. 동생들의 목욕물을 받아 들고 왔고, 파우더를 온몸에 발라줬다. 분유를 타서 들고 왔다. 엄마가 한 명을 먹이고 있을 때 나는 한 명을 붙잡고 젖병을 물렸다. 둘이 동시에 울 때는 내가 해줄 수가 없다. 엄마가 양쪽에 애들을 붙들고 간신히 달래고 있을 시간에 나는 싱크대에 가서 설거지를 했다. 키가 작아서 싱크대까지 닿지 못하기 때문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설거지를 했다. 엄마의 잔심부름은 모두 나의 몫이었다. 단 한 번도 싫다고 한 적이 없다.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나도 사회화가 필요한 나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여기저기 어린이집을 알아보았다. 처음 어린이집에 나를 보냈는데 적응을 못해 원장이 이런 아이는 처음 본다고 당장 데리고 가라고 했다고 한다. 또 한 군데를 보냈는데 거기서도 적응을 하지 못해 나왔다고 한다.(나의 기억에는 없음) 마지막으로 간 곳이 대학교 병설 유치원이었다. 어린이집보다 시설이 좋고 가격도 비쌌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아주 적응을 잘했다고 한다. 나는 이 유치원에 간 기억들이 있다. 유치원은 정말 넓어서 놀이 기구들이 많았고,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지점토로 만들기를 많이 했고, 구석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얌전하고 공작시간에 무언가를 뚝딱 잘 만든다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단 기억이 있다.
안타깝게도 어릴 적 잠이 많았던 나는 오전에 일어나지를 못했다. 엄마는 등원버스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따로 유치원에 보내는 일이 많았다. 꾸역꾸역 일어난 나에게 엄마는 A4용지와 볼펜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우리 집에서 유치원까지 길을 그려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말해주었다. 우리 집에서 길을 건너지 말고 쭉 올라가서 코너를 돌고 다시 쭉 내려가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불이 없으니까 손을 들고 건너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트에서 두부를 사 오라는 심부름만 한 것이 다였기에 그 이상의 길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모험이었다.
암마에게는 두 동생들이 양쪽에서 울고 있었고, 나를 데려다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겁을 많이 먹었다. 그때의 감정은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게 한다. 망망대해에 빠졌는데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고 혼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하는 심정이었다. 사실 나는 정말 혼자 가고 싶지 않았다. 데려다 달라고 조르고 졸라서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에게 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지도를 그려준 종이를 꼭 부여잡고 길을 나선 것이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크고 난 뒤에 그 동네 갈 일이 있어 갔는데, 우리 집에서 내가 다녔던 유치원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성인이 걸어도 15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고, 차도도 굉장히 위험했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어린 나에게 지도를 쥐어주고 유치원을 가도록 시켰을까. 내가 엄마였다면 딸을 택시에 태워서 기사님께 부탁을 했을 거리이다. 택시비가 없을 만큼 너무도 가난했던 걸까. 양쪽에 있는 동생들을 붙잡고 있느라 택시를 잡을 손이 없던 걸까.
놀랍게도 엄마는 그때의 나를 이렇게 회상한다. '너는 혼자서 유치원도 걸어서 등원하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 었어. 씩씩하게 차도도 잘 건너고, 유치원에 확인 전화를 하면 맨날 잘 도착했다고 하니까 믿었지.' 나는 단 한 번도 혼자 걸어서 등원을 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 길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길이었고, 두려운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