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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Oct 19. 2023

패션피플 내 절친 우양산이...

낡고 오래된 꼬질꼬질

10대 시절에 등산모임을 간 적이 있다. 한여름에 관악산을 오르는데, 온몸의 구멍에서 땀이 쏟아져 내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양의 땀이 나온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무 그늘이 있는 곳은 괜찮았지만 관악산은 '악'산답게 바위가 많은 편이라 등산코스에 땡볕도 꽤나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데 얼굴이 미친 듯이 가려운 것이 아닌가. 땀 때문인가 싶어서 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아내었지만 간지러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갔다.


정상에 올랐을 때 내 얼굴은 두꺼비같이 변해있었다. 두드러기가 오도도독 올라와 붉어지고 얼굴이 난리가 난 것이다. 당장 피부과에 갔다.



'등산만 했는데, 얼굴이 왜 이런 건가요?'


'햇볕 알레르기예요.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니까 걱정하시마시고요. 되도록이면 땡볕에는 야외활동 자제하시고, 모자 선글라스 양산 같은 것으로 꼭 가려주고요.' 



아, 나는 맨 얼굴로 햇볕에 덤벼들면 안 되는구나. 10대에 엄마 양산을 쓰고 다니기에는 너무도 창피한 일이었다. 그 시절의 양산은 조금은 촌스러운 레이스로 만들어진 엄마 할머니들의 전유물 같은 것이었다. 한 번씩 엄마와 외출할 때 엄마와 같이 양산을 쓴 적은 있어도 혼자 친구들과 놀러 다닐 때 쓸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던 와중 20대에 들어 대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동과 동 사이는 너무도 땡볕인 것이다. 수업을 들으러 이동을 하려면 숯불에 구워지는 오징어가 따로 없었다. L자파일로 잘 가리고 다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인터넷으로 양산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들이 쓰는 레이스 양산 말고, 나 같은 젊은 학생들이 쓸 수 있는 양산은 없는 것인가. 그때 당시는 아직 양산이 젊은 세대까지 보편화되지 않아 검색을 해도 잘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가격도 사악했다.


며칠을 고르고 골라 하나를 선택했다. 우양산이라는 것이었는데, 우산과 양산이 합쳐진 것이다. 생긴 건 우산인데, 안에 자외선 차단기능을 하는 암막천이 덧대어져 있어 양산의 기능도 함께하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우산 같이 생겼다. 우선 레이스 천이 아닌 것에 합격이었고, 스트라이프 무늬가 잔잔하게 있어 촌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귀차니즘이 심각한 나에게 3단 자동 우양산이라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무게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우양산을 쓰고 학교를 돌아다녔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 일어났다.



 '쟤는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을 쓰고 다니네.'


 '야, 이거 양산이야! 암막 안 보이냐' 

 '우산이다 그래'



그 우양산은 아직도 쓰고 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첫 데이트 날에도 난 당당하게 우양산을 펴 들고나갔다. 멀리서 걸어오는 우산을 쓰는 여자. 그날은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던 8월의 어느 날이었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양산을 펼치지 않았는데, 혼자 암막천을 뒷배경으로 도도하게 걸어오는 저 여자. 남편은 적잖이 당황스럽고, 어쩔 줄 몰라했다. 남편은 다가와 첫마디가 이러했다. 



'어, 오늘 비 온다는 일기예보 있어요?' 


'아뇨! 이거 양산인데, 같이 쓰실래요?'


'아.... 네... 제가 들게요.' 



이게 비 일리 없는 땀을 흘려대는 남편손에 넘겨주었다. 때가 꼬질꼬질 탄 나의 우양산을. 그리고 작은 우양산 안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며 머리 정수리만은 시원하게 붙어 다녔다. 땀냄새를 공유한 사이랄까. 나의 피부만 보호하면 그만이었다. 남편은 그날을 기억하면 항상 기가 막혀한다. 길거리에 혼자만 우산 쓰고 나왔다고. 처음에는 저건 뭘까 한참 생각했단다. 그렇다고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니 다행이긴 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해서 그런지 암막천 중간중간 미세한 구멍이 났다. 손잡이는 손때가 묻어 불투명했던 흰색이 회색이 되었다. 손잡이의 끝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한번 묶고 다녀야 한다. 수만번은 접어다 폈다 했기 때문에 우양산의 천은 살의 방향대로 주름이 잡혀 색깔이 진해졌다.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여태 바꾸지 않은 것은 고장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서질 때까지 쓰겠다는 어린 날의 나의 다짐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긴 시간을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내 곁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딘가에 놓고 올 만도 한데, 얘만은 꼭 챙겨서 다녔다. 햇볕뿐만 아니고, 비가 올 때도 종종 쓰는 일이 많았는데 말이다.  오래된 물건은 그 시간을 함께한 만큼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어 함부로 보내주기가 어렵다.


요즘 시대가 많이 변해서 남자들도 양산을 많이 쓰고 다닌단다. 기사를 보았는데, 작년대비 올해 양산 구매율이 남성이 12%으로 여성 5%보다 많았다고 한다. 인식이 얼마나 많이 바뀐 것인가. 내가 놀림을 받던 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봄볕에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에 딸 내놓는다는 옛말이 있다.



딸이든 며느리든 아들이든 사위든 볕이면 양산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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