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씨가 좋아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차도를 따라서 쭉 걷다 보니 웬 봉선화가 피어있었다. 봉선화는 7,8월쯤에 피는 여름꽃이지 않은가. 우리 어릴 때 여름방학 숙제로 봉숭아물들이기가 있었다. 집 앞에 펴있는 봉선화 꽃 뜯어와서 백반 넣고 찧었다. 손톱 하나하나에 붙여놓고 랩으로 징징 감아 놓으면 어느새 주황새 물이 들었다.
제 계절에 피지 않고 느지막이 핀 봉선화. 자신의 계절이 아니라 소담하게 필만도 한데, 아주 크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피었다. 봉선화는 지금 시기에도 건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 어느 꽃보다 튼튼해 보였다. 아마도 이 봉선화는 땅속 깊은 속에서 자기 동료들은 전부 피고 졌을 때도 꿋꿋이 기다리며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고 마이웨이를 걸었던 것 같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너 진짜 대단하다. 동료 봉선화가 폈을 때 안 부러웠니? 조급하지는 않았어? 너도 막 피고 싶어서 안달 나지는 않았니? 이렇게 기다렸다가 가을에 당당히 피다니. 넌 엄청난 봉선화가 맞는구나."
가을에 피어서 특별한 봉선화가 여기 있다. 남들처럼 똑같이 여름에 피었다면 내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 나도 너를 보고 배워야겠구나.
네가 원래는 여름에 피어 씨방을 만들고 내년에 필 씨앗들을 땅밑에 묻어둬야 하 듯이 여기 인간세계도 룰이 있단다. 사회가 정해놓은 적령기라고들 한다. 20대 초에는 대학교에 진학해서 20대 중반에는 취업을 해야 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는 자리 잡아 결혼할 상대를 찾아 결혼을 하고 30대 중반까지는 아이를 낳는 일. 그래서 나는 참 조급하면서 살았는데, 옆에 있는 인간들을 보면서 나도 빨리 피어야 되는데 하며 안달복달했단다. 근데 너를 보니까 알겠다.
조금 늦으면 어때, 너와 같이 멋지게 한 생 살다 가면 그만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