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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릿한 달팽이 Apr 12. 2021

내가 자유로워진 봄

눈부시게 빛난 시절이라고 기억하는 대학교 시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좌충우돌, 오르락 내리락 나름 갈등과 고민이 많았다.

이번에 읽게 된 무려 20여 년 전 수첩에 남긴 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믿음이나 기대는 내 생활에 큰 힘이 되고 나 혼자는 엄두도 못 내는 내 모습을 만들어 가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강박 관념이 되어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나는 이래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어떤 고정된 스타일로 나를 몰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꼼꼼해야 하고, 예뻐 보여야 하고, 술도 잘 먹어야 하고, 털털하면서 적극적이어야 하고... 이 모든 강박 관념이 한꺼번에 나를 짓누르는 듯한 스트레스를 하루 종일 받았다. 전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 화장 같은 것에 유난히 눈을 돌리게 되는 나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 96.4.25 다이어리

(문장 한 번 길기도 하지.)




이런 강박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10대, 20대 초까지 난 좀 '자존심'이 있는 성격이었다. 사람들 눈을 많이 의식한 건 아니고 '이상적인 자아'가 강한 정도?

이 글에서 말하는 '남들의 기대'라고 해봤자 그냥 지나가면서 하는 말 몇 마디였을텐데 그런 것을 놓치지(?) 않고 의식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 시절 나에게 지금 내가 중2 아들한테 하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 만큼 너한테 관심이 없어.")


이어리에 이런 글을 남기고 6년이 지난 겨울. 회사 다니는 것이 힘들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철학적이었던 시절, 이 일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져가며 주구장창 야근을 했다. (작년에 오랜만에 만난 회사 선배 언니 말로는 그 때 내가 '도를 닦는' 것 같았단다.)

그 때 힘들었던 건 회사 일 자체 뿐만이 아니었다. 월급은 적지만 성차별 없이 싫은 소리 안 듣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외국인 회사라는 알량한 집착이 나를 잡고 있었다. (나중에 산업 구조의 변화로 내가 회사를 뜬 지 몇 년 후 업종 자체가 사라졌지만)

회사 생활에 피폐해졌던 나는 야근 안 하는 날 집 근처 요가원에 들러서 몸과 마음의 평화를 찾곤 했다. 하루는 마음이 힘들어 요가 선생님께 고민을 얘기했다. 내 얘기를 들으시던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하셨다.

"그냥 한 번 쉬어보는 건 어때?" ​

특별할 것도 없는 선생님의  말 한 마디가 나에겐 천지개벽하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아, 그래. 그냥 그만둘 수도 있지... 내가 이제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항상 다음 계획이 있어야 안심하고 움직였던 내가 이후 계획도 없이 그런 큰 결정을 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남들은 다 취직해서 일 잘 하고 있는데 회사 그만둔 걸 어떻게 얘기할지도 신경쓰였다.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욕심 한 줌을 놓아버리니 퇴사한다는 생각만으로, 나도 퇴사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홀가분해졌다. 그렇게 회사를 나와 난생 처음 소속 없는 백수가 되었다. 이런 대책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얼마 안 있다 테솔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이후 대책이 생겼지만) 그리고 이후 나는 더더욱 내가 정해놓은 내 모습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대할 거라 생각하는 내 모습에서 아주 많이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퇴사하고 맞은 봄, 아침 햇빛에 빛나는 나무들을 보며 새벽에 요가 수련을 오가던 공원길이 기억다.
(어떤 백수가 꼭두 새벽에 일어나서 요가를 하냐며 웃었던 친구들도, 내 기억으론 가타부타 별 말씀 안 하셨던 부모님도 떠오른다.)

오랜만에 꺼내 본 다이어리가 오래 묻혀있던 기억을 끄집어내줬다. 마음껏 자유롭고 행복했던 봄을 되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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