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드라마 여럿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작품 하나가 있다. 10여 년 전 나온, 소위 마니아 드라마 비슷하게 되어버린 <그들이 사는 세상>.
좋아한 드라마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들은 일상에서 툭툭 생각나는 편인데 요즘 유독 이 장면, 이 대사가 생각난다.
지오가 스스로 초라해져 가는 자잘한 일들이 일상에서 쌓여가자 제풀에 버거워 큰 문제 없던 준영에게 헤어지자고 통보한다.
(난 이 현실적인 설정에 감탄했다. 사귀다 헤어지는 것이 꼭 크게 싸우거나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드는 사건이 아니어도 그냥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직접 경험도 없이 격하게 공감했던 나...)
어쨌거나 그렇게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지오가 하는 생각.
내가 지금 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눈도 아파 죽겠는데 나는 왜 얘랑 헤어져서 더 외롭게 내 무덤을 파는 건지.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젊어서 힘이 남아돌아 쓸데없는 짓 한다 하시겠지. 근데 어떡해. 난 젊은데.
근데 어떡해, 난 젊은데.
아,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한 마디다.
잘하는 짓이 아닌 줄 알면서도 기어이 그렇게 하고야 마는 미련함은 누구나 평생 반복하는 오류 아닌가. 그 오류를 하나라도 더 알아차리고 붙들어 매면 실행착오를 덜 할 것이고.
가끔 머리로는 알면서 불가항력처럼 다른 선택을 할 때 이 대사가 묘한 위안을 준다.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럴 수 있다는 토닥임을 받는 느낌?
사춘기 클라이맥스를 막 지난 첫째와 이제 진입하려는 둘째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된다. 내 눈엔 시간이 아깝고 헛짓으로 보이는 일들에 어처구니가 없을 때 이 대사가 떠오른다. 나도 어릴 때 장판 디자인하며 뒹굴뒹굴하고, 선물할 음악 테이프 시간 재가며 녹음하는 티도 안 나는 정성과 시간을 쏟지 않았는가.
아예 알차게 논 시간 말고 나중에 되돌아봐도 아깝다 하는 시간 낭비, 시행착오는 어린 시절과 젊음에 포함된 고정 지출 비용이 아닐까. 다만 고정 지출이 커서 빈곤해지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