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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an 06. 2019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퍽치기 사건


그냥, 걷고 싶었어요.


'이런 게 봄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찬 공기 사이사이 따뜻한 기운이 어렴풋이 느껴지던 어느 날, 점심을 먹기 위해 회사 밖을 나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매 순간이 소중했고, 그 순간의 날씨가 궁금하기도 했고, 걷고 싶었고, 다른 사람이 해준 음식을 먹고 싶었고, 기타 등등. 마침, 요리 재료가 다 떨어진 R도 동행하기로 했다. 회사 밖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날씨 좋다! 어디 갈까? 아는 데 있어?" 나보다 베네치아에 오래 산 R에게 물었다. 점심시간 직전 밖으로 나가기로 갑자기 정한 터라 정해둔 식당이나 장소도 없었다. "피자 한 조각씩 사서 산마르코 광장이나 가볼까?" 회사에서 산마르코 광장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5분~7분이면 갈 수 있다. "좋지." 관광지 근처에는 테이크 아웃 전문 피자가게가 많다. 미리 만들어 둔 피자를 조각으로 살 수 있다. 진열된 피자를 고르면 화덕에 다시 데워서 종이봉투에 담아준다. 한 조각에 3.50~5.50유로 정도. 피자 한 판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직접 반죽을 만들어서 구워준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피자를 손에 들고 산마르코 광장으로 출발했다. 관광객으로 가득한 거리는 걷다가 멈췄다를 반복했다. 멈춘 틈을 타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다른 사람이 해준 요리가 제일 맛있지.' 제대로 된 이탈리아 문화를 느끼겠다며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에 더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엔 나도 관광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일단 맛있으면 됐다.




머리를 두 번 맞았어요. 빼앗긴 건 없어요.


탄식의 다리를 지나 산마르코 성당 뒤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성당에 가려져 광장이 절반만 보이는데도 알 수 있었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길가에 레스토랑에서는 메뉴판을 들고 "본조르노!"를 외치는 직원이 사람들을 향해 연신 미소를 보낸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광장으로 들어서자 카페의 오케스트라는 귀에 익숙한 선율을 흘려보낸다. 나폴레옹은 이 곳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녹턴>에서 산마르코 광장을 '기타(a guitar)는 감히 연주될 수 없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클래식한 장소이니만큼 바이올린 같은 클래식 악기만 연주되는 곳. 그렇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고전적인 클래식 음악 중 아무거나 연주할 수는 없는 곳. 그렇다고 최신곡을 연주할 수도 없는 곳. 대신, 누구나 아는 그런 클래식한 곡을 연주해야 하는 곳. 영화 <여인의 향기>의 메인 테마곡은 카페에서 매일 빠트리지 않고 연주하는 곡이다. 덕분에, 산마르코 광장은 여전히 고풍스럽고,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피아노 이렇게 4개의 선율이 나는 본 적도 없는 과거를 상상하게 하는 곳. 가즈오 이시구로의 표현대로, 이런 중세 시대의 분위기에, 너무 현대적인 악기인 기타는 꿈도 못 꾸는 자리였다.


    산마르코 성당 오른쪽 길에서 걷고 있었다. 피자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퍽'하고 뒤통수를 때렸다. 곧바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옆에 있던 R이 봤을까 하는 생각에 쳐다봤지만 그저 걷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지나가다가 모르고 스쳤겠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의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광장 중앙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피자를 한 번 더 입에 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는 산발이 됐고, 앞사람에게 인사하듯 뒤통수가 '훅!' 하고 앞으로 숙여졌다. 아까보다 더 강력한 스매싱에 휘청했고, 피자를 놓칠 뻔했다. 눈물이 찡하게 맺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오우!!!!!" 마치 축구 경기를 보던 관중들이 공격수의 강한 태클로 심하게 넘어진 수비수를 보고 0.1초 만에 나온 탄식이 섞인 리액션이랄까. 목격자는 15명 정도. 그들의 합창 덕분에 10명은 더 돌아봤다. 고개를 숙인 채로 그 자리에서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도망가는 발만 봤어요.


범인은, 아니지 범인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니까. 갈매기였다. 나는 갈매기의 발에 뒤통수를 맞았다. 나를 때리고 도망갈 때, 내 머리카락에 노란 발이 걸려 잡힐 뻔했으니까.  


    R이 말했다."빨리 덮어.(Cover it.)" "뭐라고?" "피자, 얼른 봉투로 덮어. 안 그러면 다시 공격할 거야." 나를 놀리려는 장난인 줄 알았지만 표정도 목소리도 진지했다. 재빨리 머리를 가다듬고 피자를 덮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피자를 종이로 가렸을 뿐인데 말이다. R에게 물었다. "갈매기가 낮게 날다가 스친 거야? 아니면 나를 의도적으로 때린 거야?" "그게 산 마르코 광장 갈매기들의 사냥법이야. 네 피자를 노린 거야." "그러면 피자를 낚아채야지 왜 머리를 때리는 거야?""머리를 때리면 사람이 당황해서 손에 든 피자를 놓치니까. 피자가 바닥에 떨어지면 그걸 주워 가는 거야." 영리한 것들. 퍽치기를 시전 하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공공장소에서 어쩌다 넘어질 때면 아픔이나 창피함 둘 중 하나만 겨우 견뎌내고는 그 자리를 재빠르게 벗어나곤 했다. 그런데 갈매기 발길이 얼마나 센지, 아프고 심지어 창피했다. 사람들의 시선과 갈매기를 피해 아케이드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다 먹고 나가자." 먹기는 해야겠고 뒤통수는 욱신거리고. 목이 막혀왔다. 콜라도 살 껄. 피자를 마저 먹으며 광장의 갈매기들을 주시했다. 누구냐, 이 많은 갈매기들 중에. 열심히 눈을 굴렸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때렸다고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갈매기들 중에 누구인지 두리번거려봐야 알 리가 있나. 한양서 김서방 찾기다.




나만 당한 게 아니더라고요.


소문은 내 걸음보다 빨랐다.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R은 쿡쿡대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리지 산마르코 광장에서 갈매기한테 머리 맞았다." "진짜야?" 그래 그렇지, 안 놀리고 넘어갈 리가 없다. 사무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이내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따뜻한 사람들이다. 내가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 일은 <산마르코 광장 갈매기 사건>으로 불려졌다. 나중에 생일 카드도 받았다. '리지가 갈매기에게 맞은 산마르코 광장을 기념하며...' 이렇게 추억(?) 하나가 더해졌다.


    나중에 알게 된 건 산마르코 광장은 갈매기와 비둘기의 공동 사냥터라는 사실이다. 직접 보고 있는 게 맞는지 두 눈을 의심한 건 대놓고 음식을 뺏어간 장면이다. 피해자는 광장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카페에 앉아 디저트 케이크를 먹던 두 여자. 갑자기 테이블로 날아든 갈매기가 날개로 푸드덕푸드덕 두 여자를 밀어내며 먹다만 케이크 한 조각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두 여자는 "오 마이 갓!"을 연신 외치며 갈매기를 쫓아내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갈매기는 케이크를 삼킨 채 유유히 날아갔다. 참고로 산마르코 광장 카페에서 먹는 모든 음식은 다른 곳의 두 배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케이크는 만 원 정도는 할 텐데. 두 여자는 헛웃음을 터트린다. 이걸 누구에게 신고할 수 있을까? 그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겨둘 뿐이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갈매기(왼쪽)와 누군가의 바게트를 샤냥한 갈매기(오른쪽) ⓒ리지


쓰레기는 쓰레기 통에


어떤 사람의 눈에는 사냥하는 갈매기가 신기한 모양이다. 싸온 음식을 갈매기나 비둘기에게 직접 주거나 남은 음식을 길바닥에 두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갈매기의 음식 사냥을 더욱 부추긴다. 베네치아의 갈매기들은 더 이상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음식을 쟁취하기 위해 갈매기끼리의 싸움도 부추긴다. 현지인은 도시가 더러워졌다며 관광객을 탓하고, 관광객은 더러워진 도시를 관리하지 않는다며 현지인을 탓한다. 사실 이건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만 잘 지키면 해결될 문제다.


갈매기 퍽치기 사건의 피해자는 나 한 명이면 충분하다. 모두를 위해 쓰레기는 제발 쓰레기통에 버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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