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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Feb 18. 2019

이탈리아에 가져왔어야 했던 약



앗! 차가워! 이게 뭐야!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니터 앞에서 일하다가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다. 나를 깨우기 위해 장난을 친답시고 R이 머리 위로 물을 살짝 부은 것이다. “큭큭 리지 업무 시간에 잔대요~” “뭐야 왜 물을 뿌렸어!" "리지 일어나~" "내가 졸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있지, 아무래도 나 아픈 것 같아.” “그래? 엇, 리지 살짝 열이 있네. 어디 아파?” “실은 어제부터 온 몸에 붉은 반점들이 나기 시작했어.” 몸이 으슬으슬해서 아침에 두르고 나온 스카프를 풀었다. “윽,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더니, 목 까지 타고 올라온 두드러기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동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면 출근하면 안 돼. 일하는 게 오히려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야.” “슈퍼바이저가 출장 중이라 휴가를 못 냈어. 일단 오늘 약국에 가보려고.” 수두는 아닐 테고, 아마도 음식 때문인 것 같은데.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도 모르는데 약국에 가봐야 소통도 안 될 텐데.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음날도 약국에 가보지 못한 채 출근했다. 그런데 뜻밖의 구원자를 만났다. “리지, 나랑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가 약사인데, 증상 이야기했더니 약 먹어야 될 것 같대. 이따가 자기가 일하는 약국으로 오래.” “진짜? 고마워! 점심시간에 갔다 올게.” “그 친구 영어 잘하니까 약 살 수 있을 거야.” 유일무이한 한국인 동료 G는 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큰 도움을 주는 형제(bro) 같은 존재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비몽사몽 약국을 찾았다. “본죠르노! G랑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리지에요.” “아! 만나서 반가워요. 이야기 들었어요. 몸에 두드러기가 난다면서요?” “네, 한 이틀 되었어요. 열도 조금 있고, 저도 모르게 졸 때가 있어요." 약사는 목에 난 두드러기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음식을 잘 못 먹은 것 같아요. 약을 줄테니까 먹어봐요." 그렇게 받아온 약은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었던 약이었다. 알레르기와 두드러기를 가라앉히는 약. 이 약을 이탈리아에 와서 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요리 초보의 대실수


물의 도시에 살면서 그동안 먹지 못했던 해산물을 마음껏 먹으리라 다짐했었는데. 그 다짐이 이 두드러기의 원인이었다. 화창한 어느 주말, 싱싱한 해산물 파스타를 만들어 먹겠다며 리알토 마켓에서 해산물을 잔뜩 사 왔다. 대체 그놈의 '싱싱한' 해산물이 뭐라고. 그날 오후 내내 마켓에서 사온 해산물을 손질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이미 손질된 연어는 바로 냉동실로 직행. 오동통한 새우는 껍질을 다 제거하고 몇 마리씩 소분해서 비닐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파스타를 해 먹을 때 바로 요리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대망의 오징어 열 마리! 이날 오징어를 생전 처음 손질해보았는데, 껍질을 벗기는 게 얼마나 어렵던지. 세 마리째 손질하면서 '이걸 왜 사 왔을까?'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나머지 일곱 마리를 그냥 버릴 수도 없고. '요리하면 맛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몇 시간 동안 오징어를 손질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뻐근해진 두 팔로 냉동실 문을 열어 이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았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가.   


야심차게 구워냈던 연어와 호박 &  당근 ⓒ리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막 요리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던 나의 오만이었다. 손질하는 과정에서인지, 혹은 얼렸던 것을 해동하는 과정인지, 아무튼 이 해산물들의 손질과 관리가 상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 주말 이후로 며칠간은 내가 요리한 음식만 먹었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오징어! 아무래도 오랜 시간 손질했던 오징어 파스타를 먹고 두드러기가 난 것이 틀림없다.



왜 알레르기 약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장기간 외국에서 생활을 할 때면 빠지지 않는 출국 준비 절차가 있다. 바로 약국에 가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약을 사는 일이다. 나 역시 이탈리아에 오기 전 약국에 들러 온갖 종류의 약을 샀다. 소화제, 진통제, 파스 등 다양한 약을 챙기며 꼼꼼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물의 도시로 오면서 해산물이 들어간 요리는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저 신나게 먹을 생각만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피자, 파스타, 다 익힌 음식이잖아? 음식을 잘못 먹었다면 며칠 배탈 나고 말 거라는 생각은 아주 순진한 착각이었다.


나는 이날 이후로 두 번이나 더 두드러기를 마주해야 했다. 마켓을 갈 때마다 싱싱한 해산물 재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로 두드러기가 났을 때 약을 꺼내먹으며 생각했다. "이제... 해산물 요리는 그냥 사 먹어야겠다..." 그리고는 손질이 어려운 해산물은 사지 않았다. 요리 자신감 대폭 하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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