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살짝 길치다. 처음 베네치아에서 집을 구할 때 집을 보러 가다가 길을 잃어서 가지 못한 적이 몇 번 있다. 스마트폰과 지도가 있어도 소용없다. 나에겐 정말 슬픈 일이다. 처음에 길을 잃었을 때는 애꿎은 지도를 탓했다. 지도가 미로처럼 복잡한 베네치아의 길을 세세하게 반영하지 못해서 길을 잃는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난 여전히 길을 잃었다. 그래,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길치가 아닌 사람들도 길을 잃는 마당에 길치인 내가 지도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겠지. 아무리 좋은 지도가 있어도 길을 못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슬퍼졌다.
길을 잃으면 순식간에 공포감에 휩싸인다.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게 느껴지고 작은 소리에도 크게 놀란다. 제일 놀랐을 때는 막다른 길로 들어섰을 때다. 막다른 길에 놀라 뒤를 돌아보면 다시 한번 놀란다. 내가 왼쪽에서 왔는지 오른쪽에서 왔는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때의 당혹감과 답답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는 신기하게도 막다른 길로 잘 들어갔다. 분명 지도를 따라 열심히 걷고 있는데 앞에서 길이 끊기고 출렁거리는 물결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밤이어서 어두운 거겠지라는 생각에 들어선 길은 막다른 길이었다. 듣고 있는 음악에 취해 그대로 직진했다가 빠지기라도 한다면 구해줄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베네치아에서는 핸드폰이 잘 터지지 않는 곳도 꽤 있다. 그럴 때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관광지 근처로 나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필 핸드폰도 말썽이어서 추운 날씨에 밖에서 꺼내보면 방전되기 일쑤다.
이런 나를 위해 처음 며칠 동안은 회사 동료들이 퇴근하고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J의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J랑 같이 다녔다. 그러나 집을 구해 이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 길을 잃자 동료 R은 하얀 종이를 꺼내 지도가 없을 때 베네치아에서 길을 찾는 몇 가지 방법을 설명해줬다. 그의 표정은 물고기를 잡아주다가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비장했다. 길을 찾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R의 말에 따르면 베네치아에는 길 종류가 많지만 표지판을 보고 6종류만 구분할 수 있어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정말로 그랬다. 나중에야 알았다. 길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도 되는 길과 가면 안 되는 길을 구분하는 일이라는 걸. 가면 안 되는 길을 안다는 것은 마치 객관식 문항에서 확실하지 않은 답 한 가지를 지우는 것과 같았다. 지도도 소용없고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을 때 가지 말아야 길만 알아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생활에 유용한 방법이지만 심적으로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R은 그걸 알고 나에게 길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줬던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섯 가지를 구분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R은 구글 지도를 열어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칼레는 알지? 칼레에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양쪽이 건물 벽으로 되어있어서 좁고 어두워서 그렇지 길을 잃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이건 나도 안다. 나에게 가장 무해한 길은 칼레(calle)다. 칼레는 '좁은 길'이라는 뜻으로 양쪽이 벽으로 이루어진 길을 부르는 말이다. 칼레에는 성인 한 명이 길 한가운데서 양 팔을 다 펼치지 못할 만큼 좁은 길이 대부분이다. "길 다닐 때 칼레 이름 꼭 확인해. 알겠지?""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알겠다." 괜히 자존심이 상해 살짝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도를 볼 때 우리나라 도로명처럼 되어 있는 길 이름을 꼭 확인한다.
그다음에 설명하는 것도 뭔지 알고 있었지만 내 친구를 쓴소리를 덧붙였다. "너는 광장에서도 조심해야 돼. 광장하고 이어진 칼레가 엄청 많은데 광장에 사람이 많으니까 헷갈릴 거야. 잘 찾아서 나가야 길을 안 잃어버릴 수 있어. 피아짜(piazza), 피아짤레(piazzale), 캄포(campo), 캄피엘로(campiello)는 다 광장이라는 뜻이야. 크기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 피아짜랑 피아짤레가 제일 큰 광장이야." 광장이 뭔지는 알고 있었지만, 종류가 많다는 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광장 크기마다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는 것은 몰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가 내리는 걸 보고도 소나기, 여우비, 안개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은 크기를 보고 광장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엄청난 팁이 있는 줄 알았는 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R은 어떻게 알았는지 나더러 집중하라고 했다. "여기야 여기, 네가 제일 조심해야 되는 곳. 어제도 라모(ramo)로 들어갔다며?" 사전에서 라모를 검색하면 식물의 가지, 즉, 갈라지는 부분이라고 나온다. 길로 따지면 칼레(calle)의 한 가지(branch)인 셈이다. 길치어로 설명하자면 막다른 골목이다. 내 두려움의 실체는 이것이었다. 나에게 이보다 더 두려움을 주는 길은 없다. 막다른 길에도 이름이 따로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은 막다른 길에게 너무 과도하게 친절한 거 아닌가. 어쨌거나 명칭을 확실하게 외우기 위해 '라모'라고 몇 번을 중얼거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이미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폰다멘타는 한쪽은 건물이고 한쪽은 운하야. 줄여서 F.라고 표시하는데 사람들이 그게 뭔지 모르고 지도 검색해도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 이것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폰다멘타는 대운하 사이사이의 작은 운하를 따라 놓인 길이다. R의 설명을 듣고 나서 알파벳 F만 외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는 저녁에 와인 마시고 조심해야겠다."
생각보다 정말 간단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더 물어봤다. "길 구분하는 거 말고 완전 길을 잃었을 때 쓸 수 있는 다른 방법 또 있어?" R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일단은 베네치아 전부 다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 알고 있지? 베네치아에 섬끼리 이어주는 다리 3개 있잖아, 그 다리로 가는 길은 노란색 표지판으로 되어있어. 길을 잃으면 노란색 표지판 보고 따라가서 그냥 배 타고 집에 가. 아니면 기차역(Ferrovia)으로 가서 배를 타든 지. 모든 길은 기차역으로 가게 되어있으니까." 이야기를 듣고 무슨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알려주냐면서 대꾸했지만 생각해보면 길도 모르겠고 핸드폰도 안 될 때는 저 방법이 최고이긴 했다. 가장 확실하게 길을 찾는 방법이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맨다. 길치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길을 잘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베네치아에 오래 살아도 새로운 길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예전만큼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나를 당황하게 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미로 같은 길이 유발하는 두려움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른다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 그럴 땐 가면 안 되는 길이 어딘지만 알아도 큰 도움이 된다. 가야 할 길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을 알아보고 넘어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또다시 길을 잃어도 언제든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