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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Nov 17. 2019

이웃 사랑은 빨랫줄을 타고



직장인에게 주말은 황금 같은 시간이다. 햇살이 따뜻한 토요일 아침, 출근을 안 하는 날이니까 평소보다 느지막이 일어났다. 아침 아홉 시 반쯤 되었을까? '위이이잉-' 더 자고 싶었지만 다른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게다가 어느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어떤 스피커가 그렇게 성능이 좋은지 온 동네가 다 들리도록 쩌렁쩌렁하게 음악을 틀어놓은 터라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유아 더 댄싱퀸(You are the dancing queen)" 그 집의 선곡은 아바(ABBA)의 댄싱퀸(Dancing Queen)이다. 그래, 주말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기에 좋은 노래지. 이 정도면 옆 동네까지도 들릴 것 같은데 아무도 그 집을 찾아가 노랫소리 좀 줄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층간소음으로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다.


    댄싱퀸 덕분에(?) 활기차게 아침을 맞이했다. '주말이니까 청소도 하고 밀린 빨래도 좀 해야겠다.' 처음 베네치아에서 알록달록한 집들을 보면서 이곳은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어쩜 빨래도 이렇게 알록달록하게 할 수 있을까. 예쁘다." 내가 가진 무채색 옷과는 대비되는 쨍한 색감의 옷들이 널려있는 빨랫줄을 보며 벽돌집과 어우러진 알록달록한 색감에 푹 빠져들곤 했다. 그런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빨래는 그냥 빨래일 뿐이다. 세탁의 기본 원칙대로 흰 옷은 흰 옷끼리, 파란색 옷은 파란색 옷끼리 모아서 빨래를 하고 널었을 뿐인데 집 밖에서 바라보면 여러 집의 빨랫줄이 한 폭에 모이면서 마치 그림 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때는 마치 정부에서 집마다 무슨 색깔 빨래를 할지 정해주고 콜라주를 해놓은 예술 작품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었다. 무라노와 부라노 섬에 있는 집처럼 말이다. 




베네치아의 빨랫줄은 한 집의 창문에서 시작해 건너편 집의 창문에서 끝난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창문을 열고 줄다리기를 하듯이 빨랫줄을 잡아당기고 밀며 빨래를 넌다. 빨랫줄은 도르래로 연결되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줄을 왔다 갔다 밀고 당겨올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창문에 방범창이나 모기장 같은 것을 설치한 집은 거의 없다. 밖에서 보면 빨랫줄이 건물과 건물을 연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동네의 집들은 다세대 주택이다 보니 건물과 건물마다 빨랫줄로 연결되어있다. 그런데 아무 빨랫줄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집마다 사용할 수 있는 빨랫줄이 정해져 있다. 우리 집의 경우 방은 세 개, 사람은 다섯 명인데 빨랫줄은 한 개다. 그 빨랫줄이 내 방 창문에 있는 빨랫줄이다. "혹시 너 출근하고 나면 내가 빨랫줄을 써도 될까?"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날 플랫 메이트들은 내 방에 들어와도 되는지를 물었다. 평일에 내가 출근하고 나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의 동거인들은 빨래를 돌린다. 내가 방에 있을 때도 써도 되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주말에는 나더러 쓰라며 빨랫줄을 양보해준다.


    부지런히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빨랫줄에 널려고 하는데 자꾸만 아래를 쳐다보게 된다. 빨래가 떨어지지 않도록 빨래집게로 고정을 해야 하는데 손이 후들거렸다. 창틀에 배를 반쯤 걸치고 줄을 끌어오는데 어휴, 아무래도 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우리 집 애들이 어떻게 하면 잘 된다고 알려줬는데 내가 하니까 잘 안된다. 다들 어떻게 빨래를 넌담. 어질어질해서 몇 번을 창틀에서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며 빨래를 널고 있는데 빨랫줄과 연결된 앞집 창문이 열린다. 앞집에 사는 할머니다. "본 죠르노" 할머니는 한 손을 살짝 들며 웃었다. "본 죠르노" 나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부스스한 잠옷 차림으로 서로 인사를 하는 게 멋쩍으면서도 슬쩍 미소가 지어진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나도 여기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내 방 창문에 설치된 빨랫줄. 앞 집 창문과 연결되어 있다. ⓒ리지



    어렵사리 빨래를 널고 쉬고 있는데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뭔가 분주하다. "굿모닝! 무슨 일 있어?" "응. 앞집 빨랫줄이 꼬여서." 부엌 창문으로 가보니 앞집 빨랫줄이 단단히 꼬여있다. 보통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빨래를 걷는데, 밤새 그냥 두었던 옷들이 줄과 함께 엉킨 모양이다. 건너편 창문에서 전화번호를 불러준다. 우리 집의 엄마라고 불리는 D가 급하게 핸드폰을 찾는다. 둘은 전화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앞집 자매 두 명, 우리 집 사람 두 명이서 창문에 매달려 줄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지만 단단히 엉킨 빨랫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앞집 자매 두 명이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주말 아침부터 미안해요." 우리는 그럴 수도 있다며 서로 이름을 이야기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빨랫줄 때문에 만났지만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를 보다 보면 그 집의 모습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떤 집은 빨랫줄이 온통 하얀색 수건과 티셔츠로 가득하다. 어떤 집은 앞치마와 테이블 매트를 널어놓았다. 어떤 집은 빨랫줄이 온통 갓난아이 옷이다. 어떤 빨랫줄은 찢어진 청바지와 알록달록한 티셔츠로 채워져 있다. 나야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서로를 오래 알아왔을 것이다. 그들이 오며 가며 이웃의 빨랫줄을 본다면 서로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아기는 이제 말을 잘하나요? 테이블 매트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바꿨군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내가 봐도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한 동네에 같이 살았던 그들은 서로 물어볼 말이 얼마나 많을까?


    창문에서 빨래를 널다 보면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빨래를 널다 앞집 할머니를 마주쳤던 것처럼 말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빨래를 걷으려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리고 가끔은 빨래를 걷다 창틀에 매달려 길가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다. 줄리엣의 집이 있다는 베로나에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이곳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많다. 


    빨랫줄은 빨래를 널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이웃 간의 사랑이 시작되는 '사랑의 짝대기'가 되기도 한다. 빨랫줄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의 이웃은 안녕한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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