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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Dec 24. 2018

천사가 있다면 이 사람일거야



베네치아에서 길을 걷게 되면 선글라스 뒤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체국, 세무서, 은행을 찾는다. 생존에 꼭 필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슈퍼마켓을 찾는다. 보통 일주일에 두세 번, 퇴근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식재료를 산다. 그런데 같은 마트 체인점이더라도, 위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베네치아 인기 관광지 근처는 마트 물건도 다른 지역보다 조금씩 더 비싸다. 집 근처 마트 세 군데를 자주 가보는데, 과일, 시리얼, 우유, 치즈 등 몇 개만 사도 금방 40~50유로가 된다.


아침 햇살이 따뜻하던 어느 토요일 아침, 싱싱한 사과를 먹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준페이와 리알토 마켓(Rialto Market)을 찾았다. 우리나라 3일장, 5일장과 비슷한 리알토 마켓은 오전에만 열리는 시장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시장이 열리는데 보통 12:30분이면 재료가 많이 동나 문을 닫는 가게가 많다. 과일부터 채소, 해산물, 고기, 수제 파스타 면, 꽃과 화분 등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다. 좁은 길에 펼쳐놓은 천막 사이사이는 지역 주민들의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장바구니를 들고 온 주민들은 다섯 걸음도 못 가 반가운 얼굴과 양쪽 볼에 살짝 입을 맞추는 이탈리아식 인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꽃집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준페이 ⓒ리지


현지 파견 지원금으로 사는 외국인 근로자에게는 몇 가지 사치품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바로 꽃이다. 그런데 리알토 마켓 입구에서부터 한 움큼 불어오는 꽃향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준페이와 나는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꽃집 앞에 섰다. 준페이의 결정은 빨랐다. "나는 장미 살래." 나도 사고 싶은데. 살까 말까, 살까 말까. 내가 고민하는 동안 준페이는 이미 빨간 장미 한 다발을 품에 안은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살래. 사무실 책상에 둬야지. 저는 프리지아 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꽃을 놓으면 일도 더 잘 될 거란 믿음으로 프리지아 한 단을 품에 안았다. 좋은 일이 생길거면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사람도 만나면 좋겠다.


꽃을 안은채 리알토 마켓의 제일 안쪽으로 이동했다. 수산 시장 입구에서 짙은 바다향이 꽃향기를 위협하고 있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는 각종 생선과 해산물로 만든 음식이 유명하다. 오전에 열리는 리알토 마켓은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촤르르르” 매대에 얼음을 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시장 근처에 가기만 해도 해산물의 냄새가 물씬 밀려온다.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천막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은 뿌듯해 보인다. 나 역시 우산을 가져오지 못해 비를 맞았지만, 프리지아도 한 단 샀고, 싱싱한 사과도 살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리알토 마켓 제일 안쪽에 있는 수산물코너. 준페이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왼쪽) ⓒ리지


나는 아직 해산물은 요리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구경만 실컷 한 뒤, 이 곳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채소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가족이 운영하는 채소가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둘이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척척 움직인다. 매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재료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천막을 한 바퀴 돌고도 코너 뒤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 받아요~” 손님이 사람 얼굴만 한 호박을 주인에게 던졌다.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주인이 천막 밖으로 나올 수가 없어 손님들이 종종 오렌지나 사과 등을 던져준다. 때문에 번호표를 뽑아서 순서가 되면 물건을 살 수 있다. 나 역시 사람들 틈 사이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며 무엇을 살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채소 가게 앞 길게 줄을 서있는 사람들 ⓒ리지


그렇게 한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기분이다. 프리지아도 내 품에 있고, 지갑도 있고, 핸드폰도 있는데.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 이탈리아어로 숫자 모르지!!!!!!!!’


지난번에 갔던 우체국과는 다르게 순서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가게 주인이 숫자를 부르면 번호표를 보여주면서 대답을 해야 한다. 당연히, 이탈리아어로 숫자를 부른다. 순서를 놓치면 더욱 큰일이다. 내 순서가 지나갔다고 이탈리아어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집에서 보기로 하고 수산시장에서 헤어진 준페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옆에 아저씨를 쳐다보니 자신의 번호표를 보여준다. 아저씨는 539번, 나는 550번이다. 그렇다면 아직 내 번호는 지나가지 않았는데, 그전에 무슨 수를 내야 했다.


한지처럼 얇은 종이로 된 번호표 ⓒ리지



뾰족한 수가 없어 이 작은 번호표를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얼굴 옆에 가져다 대고 서있었다. 번호를 보고 말해주겠지. 말해줘야 하는데. 내가 이상한 모양으로 서있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숫자를 모른다고 말하며 웃자, 아주머니가 갑자기 손짓으로 내 번호표를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번호표를 뺏기는 줄 알고 당황해하던 찰나, 아주머니의 번호표를 내게 주며 바꾸자고 손짓했다. 아주머니의 번호는 548번. 내가 번호를 모르니 본인 앞 번호로 바꿔주신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라찌에 밀레(Grazie mile!)” 그렇게 10분 정도 더 기다린 뒤, 주인아저씨가 부르는 숫자에 옆에 아주머니가 나를 톡톡 치며 주인아저씨를 가리킨다. 그리고는 주인아저씨에게 뭐라고 말을 해준다. 아마 내가 548번 손님이라고 알려줬을 것이다.


아주머니 덕분에 수월하게 사과와 토마토를 샀다. 브로콜리와 시금치도 한 가득 샀다. 가게를 나오며 번호표를 바꿔준 아주머니에게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준페이네 집으로 돌아와 사온 것들을 꺼내보니, 내가 사겠다고 가리켰던 것 말고도 오렌지랑 키위가 각각 세 개나 담긴 봉투가 있었다. 가게 주인이 덤으로 과일을 넣어준 것이다. 이 가게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그 아주머니에게는 사소한 친절일 수 있지만 나에겐 엄청난 감동이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에게 나를 보호해주는 천사가 있다면 분명 저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리알토 마켓에서 사온 싱싱한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가게 주인이 선물로 넣어준 키위와 오렌지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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