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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Nov 17. 2019

밥값을 계산하려는데 십 분이 지나도록 기다렸어


친구가 베네치아에 놀러 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나는 저녁을 먹고 산마르코 광장까지 걸어가서 야경을 보자고 했다. 나도 퇴근하고 집에 가는 터라 야경을 볼 일이 없으므로 좋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직원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다. 친구는 왜 그런지 물었지만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베네치아에 사는 친구들이랑 식사를 했기 때문에 직원과 이야기하는 일은 친구들이 해줬던 것이다. 계산하는 동안에도 다른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느라 얼마나 걸리는지도 몰랐다. "나 열 시 반까지는 호스텔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다. 나는 집이 있지만 친구는 귀가 시간이 있는 호스텔로 돌아가야 한다. 초조해진 우리는 식당에서 빨리 나가기 위해 지나가는 직원에게 다시 한번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직원은 카운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원에게 가서 뭐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제 뭐지? 우리 무시하는 건가?"



네 맘을 훔칠 사람 나야 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식당 입구에서 나를 테이블로 안내해주는 그 직원이 나의 저녁시간을 책임지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바로 식당 홀 매니저다. 정확한 직함이 매니저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은 홀에 있는 모든 손님들을 책임진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 직원은 내가 식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나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담당한다고 이야기하면 뭔가 딱딱한 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담당한다는 말은 내가 이 식당에서 기분 좋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싶다. 담당 직원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 식당이 좋은 식당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곳이라면 절대 아무 직원이나 홀에 비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손님의 마음을 홀려 훔치려는 매력적인 대선 주자 같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교성이 좋아 손님들과도 쉽게 친해지며, 손님이 필요한 것을 콕 집어낼 수 있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홀 전체 분위기를 활기차게 띄우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테이블 사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안부를 묻고 굶주림을 채워주며 분위기를 띄워주곤 했다. 식당이 큰 경우 이들이 손님들과 대화를 하고 서빙은 식당에서 일을 배우는 듯한 사람들이 맡기도 했다.



현지 식당 직원들은 <예쁜말학과> 전공했나 봐

이탈리아 사람들의 저녁식사는 보통 한두 시간 이상이다. 그 시간 동안 무례하지 않은 적절한 말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어려운걸 그들은 척척 해내고 있었다. "보나세라(buonasera)." "보나세라. 두 명이요." 직원은 식당 입구에서 나와 인사를 하고 자리로 안내해준다. 자리에 앉을 때부터 이 직원과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오, 이탈리아어 할 줄 알아요?""네, 아주 조금이요.""오, 그렇군요. 반가워요." 직원은 메뉴판을 주고 다시 돌아오겠다며 홀연히 사라진다. 한 번은 혼자 식당에 간 적이 있는데 혼자 식사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내게 주었다. "들어와요. 여기 앉아요. 내가 옆에 앉아서 와인 마실 때 짠 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더니 본인 자리라며 옆자리의 의자를 두 번 톡톡 두드린다. "하하. 오케이. 고마워요." 농담인걸 알았지만 혼자인 게 무안하지 않도록 신경 써준 게 고마웠다.


    직원들은 제일 잘 나가는 메뉴나 그날 들어온 싱싱한 재료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는 식당에 가면 내 테이블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꼭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한다. "이거요. 우리 식당 트러플 파스타가 세계 최고의 파스타예요. 트러플 알죠? 음~(하고 침을 꿀꺽 삼킨다) 이 파스타,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거예요." 중년의 아저씨가 상체를 낮춰 세계 최고라고 속삭이는 모습에 슬쩍 웃음이 나온다. 고가의 메뉴를 팔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파스타라는 말에서 자부심도 느껴졌다. "그래요, 그럼 파스타는 이걸로 할게요.""굿 초이스"라며 엄지 척 칭찬을 해주면 마치 이 사람의 잃어버린 딸내미가 된 기분이다. 직원은 주방으로 가서 주문을 해주고 돌아와 내가 주문한 음식에 맞게 식기구를 다시 세팅해준다. 그리고는 빵을 썰어서 바구니에 담아 물과 함께 가져다준다. 곧이어 주문한 와인을 가져와 먼저 시음을 하게 해 준다. "와인 맛 괜찮나요?"


    와인을 두고 잠시 사라졌던 직원은 음식과 함께 나타나 맛있게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고는 미소를 짓는다. "보나뻬띠토(Buon appetito)!"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는 5분 만에 꼭 다시 나타난다. "투토 베네(tutto bene)?" 자신이 추천해준 음식이 괜찮은 지를 물어본다. "맛있어요. 고마워요."라고 하자 뿌듯하다는 미소를 짓는다. 직원은 다른 테이블을 오가며 내가 먹는 속도를 힐끔힐끔 확인한다. 그리고는 먹는 속도에 맞춰서 다음 코스 요리를 준비하도록 셰프에게 알려주고 적당한 타이밍에 다시 나타나 식기구를 바꿔준다.


    식사를 마치면 현지인들의 식사에 절대 빠지지 않는 디저트를 먹을 건지 물어본다. 배 불러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하자 "오우, 우리 식당에 홈메이드 케이크 있는데 진짜 맛있는데..."라며 말을 흐리는 것이다. 그러더니 옆 테이블에서 "한 번 먹으면 절대로 포크를 내려놓지 못할걸요?"라고 덧붙인다. 직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조금만 달라고 해서 먹었더니 안 먹었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겉 보기엔 볼품없어 보이는 피스타치오 케이크는 입에서 살살 녹으며 사라졌다. 그렇게 식사를 다 마치고 계산서를 달라고 하면 내가 주문한 내용을 확인해주며 괜찮았는지 다시 한번 물어본다. 계산을 마치고 잘 자라는 인사까지 듣고 나면 나는 어느새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말을 이미 내뱉고 있었다. 저렇게 바쁜 와중에 어떻게 예쁘게 말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이 모든 과정을 식당에 다른 손님들과 진행한다니, 홀 직원들의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도 오지 않는 이유

이 모든 것들을 몰랐을 때는 빨리 계산하고 나가려고 지나가는 아무 직원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그때는 앉은자리에서 계산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국에서처럼 아무 직원에게나 요청해도 되는 줄 알았다. 당연히 아무나 붙잡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계산서를 줄 리가 없다. 나를 담당하는 직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내 테이블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가서 알려주더라. 몇 테이블 떨어진 거리라 무슨 이야기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당신 테이블 손님이 계산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테이블을 담당하는 직원 역시 내 테이블만 담당하는 게 아니니 내가 기대한 것만큼 빨리 만날 수 없었다.


    어떤 식당에서는 계산대에 직원이 자리를 계속 비우지 않고 있길래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저 사람에게 직접 계산서를 요청하면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하고. 곧바로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 사람을 바라보며 "익스큐즈미(Excuse me)"와 함께 손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내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사각형을 그리자 직원은 잠깐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다. 눈이 마주쳤으니까 곧 오겠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직원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직원을 카운터로 부르더니 무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때 깨달았다. 나를 담당하는 저 사람 말고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식당은 그저 밥을 먹고 나오는 장소로만 생각했다. 물론, 그런 장소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식당은 음식을 파는 곳 그 이상이었다. 식당은 나와 직원의 만남,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되는 곳이었다. 이제는 식당에서 한 사람만 바라본다. 나랑 맨 처음에 인사한 사람, 오늘 저녁엔 당신이 나의 운명이다. 유아마이데스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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