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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Nov 17. 2019

빈자리가 있는데 저녁을 먹을 수 없는 이유



관광객과 현지인은 저녁식사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관광객은 저녁을 먹고 할 일이 너무 많다. 저녁을 먹고 곤돌라도 타고 야경도 보고 젤라또도 먹고 마트 문 닫기 전에 가서 캔맥주고 사야 하고. 숙소에 가서는 샤워하고 그날 찍은 사진도 보고, 다음날 날씨랑 일정도 살펴보고 자기 전에 맥주도 한 잔 해야 하는데. 현지인의 저녁식사는 말 그대로 오로지 저녁식사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저~녁~식~사가 되겠다. 우리가 저녁 먹고 곤돌라를 타서 야경도 보고 젤라또도 먹고 마트도 다녀올 동안에도 저녁식사는 계속된다. 또한, 관광객은 저 정도의 저녁 일정을 소화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일곱 시 반 전에는 저녁을 먹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지인의 저녁 식사는 빨라야 일곱 시 반부터 시작한다.


서로 생각이 다른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저녁식사를 하면 그만이다. 관광객은 일찍 저녁을 먹고 원하는 일정을 소화하면 되고, 현지인은 해피 아워(happy hour)를 보낸 후 천천히 식사를 하면 된다. 관광지에는 식사 시간이 일정하지 않을 관광객을 위해 오후에도 문을 닫지 않고 영업하는 식당이 많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것을 원할 때다. 바로 관광객이 현지인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싶을 때다. 현지인이 관광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광지에서는 몇 시에 가더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관광객이 현지인이 가는 맛집에 가려면 식사와 저녁 일정 둘 중 하나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식사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호기심만 가득하던 시절, 베네치아 현지인 맛집을 추천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가 저녁을 못 먹은 적이 있다. 한 번은 여섯 시 반쯤 식당에 갔더니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그걸 보고 한가하게 식사할 수 있을 줄 알고 좋아했다. 그런데 직원이 지금은 문을 닫았고 일곱 시 반에 다시 연다는 것이다. 자리도 비었고 가게 안에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그래, 분주하게 움직이는 건 식당 문을 닫고 재료를 준비하는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자리가 다 비었으니까 기다렸다가 식당 문 열면 식사할 수 있는지를 묻자 전부 예약이 되어있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 내가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이들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례하다고 판단한 내 잘못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식문화를 배울 때 음식의 종류에 집중해서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먹을지에 대한 방법은 뒤로하고 무엇을 먹을지에만 더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지금은 현지인의 저녁 식사 시간도 알고 식사를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나 역시 관광객이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현지인보다 이른 시간에 식사를 하고 싶을 때가 많다. 나는 여기에 사는 사람이니까 저녁 일정 포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섯 시쯤 이미 퇴근은 했고, 집에 갔다가 식당 여는 시간에 다시 나오기도 귀찮고, 배도 고프고, 맛있는 음식은 먹고 싶은데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고 싶지도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면 그냥 집에 가자고 발길을 돌리다가도 걷다 보면 배가 더 고파진다. "집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 사무소에서 집까지 걸어가면 50분 정도 걸린다. 아침이라면 바포레토를 타고 25분 정도면 집에 갈 수 있지만 저녁 시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배를 타는 사람이 많을 시간이라 길게 줄을 섰다가 배를 못 타고 보내는 일이 많다 보니 한 시간도 더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 더구나 배를 타더라도 앞 뒷사람 하고 따닥따닥 붙은 채로 가야 한다. 몇 번 험난한 귀갓길을 경험하고는 몇 번 운동삼아 걸어서 집에 가기 시작한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한여름에는 이렇게 걸어가다가 정말 지치는 순간이 온다. 베네치아에는 그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냥 피자집에 가서 피자 한 조각을 먹는다. 조금 더 맛있는 게 먹고 싶은 날에는 해피 아워에 문을 연 바(bar)에 들어간다. "보나세라(buona sera). 치케티 이거랑 이거 두 개 주세요." 보통 현지인들은 아페리티보와 함께 먹지만 나는 배가 고프니까 그냥 치케티만 먹는다. 그렇게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집까지 힘차게 걸어간다.


퇴근하기 전부터 배가 고플 때는 간단하게 때우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정말 방법이 없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주 가는 식당으로 향했다. 문을 열었길래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녁식사 예약이 몇 시부터인가요? 혹시 지금 저녁을 먹고 예약 시간 전에 일어나도 될까요?""그래요. 들어와요." 정말이지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시간 안에 먹고 나가려고 최대한 파스타 같은 걸로 간소하게 주문했다. 다른 테이블 손님들도 모두 관광객인 것 같았다. 이 식당은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져서 예약 식사 전에 관광객을 받는 모양이다. 나보다 이탈리아에 오래 살았던 친구에게 물으니 관광객들은 일찍 저녁을 먹는다는 걸 알고 예약시간 시작 전에 손님을 받는 데가 있다고 한다. 대신 바쁜 식당에서는 직원들이 예약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해서 내가 예약해서 식사하는 것만큼 신경 써주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퇴근한 자취생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더라!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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