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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May 12. 2019

[홍콩여행기]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

홍콩에 다녀와서


01

홍콩에서 마주친 한 남자. 나는 지금도 그 남자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남자와 마주쳤던 짧은 순간, 그 남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줬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02

저녁 해질 무렵 도착한 홍콩. 숙소에 짐을 놓고 밖으로 나오자 소문으로 익히 들었던 화려한 밤거리가 눈 앞에 펼쳐졌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노래 가사를 이해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별들이 질투할 듯한 야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어지러웠다. 제일 높은 건물이 5층인 베네치아에서 살던 나는 초고층 빌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홍콩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의 분위기가 있었다. 화려한 빛과 어둠의 대비가 만드는 조화라고나 할까? 캄캄한 밤하늘 사이로 레이저 불빛이 내는 화려한 분위기. 음악과 함께 고층 건물들이 내뿜는 레이저쇼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s)는 현란함과 화려함의 절정이었다. 불빛은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볼 수 있었다. 초고층건물의 외벽을 따라 눈길을 점점 더 아래쪽으로 내리면, 건물의 아래쪽 거리마다 커다란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며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환영했다. 불빛 아래로, 홍콩의 명물 이층 버스와 전차는 관광객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화려한 볼거리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면 딤섬부터 밀크티까지 온갖 다양한 먹거리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반짝이는 홍콩의 야경 ⓒ리지



03

세계 어디를 가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이 있다. 외국에서 현지인도, 관광객도 아닌 그 무언가로 살다 보니 현지인을 찾아내는 기술을 기르게 되었다. 관광객을 사로잡은 화려한 것들 속에서, 내가 들여다본 홍콩 현지인들은 왠지 모르게 쓸쓸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젊은 직장인들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줄을 서있던 버스 정류장에는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쯤이면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합류하여 더욱 북적인다. 버스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있다. 퇴근하는 사람들부터 저녁을 먹으러 가는 관광객들까지, 그야말로 만원이다. 여기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직장인들의 표정이다.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들. 핸드폰은 꺼내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몸이 끼여있어서, 손잡이만 겨우 붙잡고 있는 상황. 그저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한 표정일까? 아마도, 창밖에 그들과는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는 여행자들을 본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유롭고 한가하게 여행하는 관광객들을 보며 자신의 인생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된다. '대체 내 인생은 뭔가.'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차창 밖 풍경. '내 인생은 이렇게 회사에 다니다가 끝나는 건가?라는 생각들이 나기도 하고. 도무지 긍정적인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운, 인생의 끝을 생각해보게 되는 그런 광경들.


사실, 이런 감정은 세계 어디에 살든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는 일이다. 인생에 대한 고민 역시 살면서 누구나 풀어내야만 하는 숙제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감정들이 홍콩의 화려함 때문에 더욱 부각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볼거리와 먹거리로 가득한 홍콩에서는, 일상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인생의 고민들을 멈춰줄 것 같았다. 여행자들은 그럴 수 있다. 잠시 머무는 동안 일상의 고민에서 벗어나 마음껏 즐기면 된다. 그러나 이것이 현지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인생과 대조하여 보여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는 장면 속에 대비되어 보이는 힘든 하루의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04

이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단했던 하루를 견디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나는 그 이유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홍콩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 때문이다.


그 남자를 마주친 곳은 홍콩의 타임스퀘어 광장이다. 어두운 밤이 되어 간판과 네온사인으로 더욱 화려한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 쇼핑센터 앞. 어떤 남자가 이어폰을 낀 채 코즈웨이베이(Causeway Bay) 지하철 역 출입구를 향해 서있다. 이렇게 번쩍이는 불빛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시선은 오로지 핸드폰과 지하철 역 출입구만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는 네온사인들이 무안할 정도로 미동도, 표정 변화도 없다. 그러다가 이내 시선을 한쪽으로 고정한 채 슬그머니 수수한 미소를 짓는다. 혹시 내가 못 보고 놓친 무언가가 있나 하고 남자의 시선 끝을 따라가 보았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출입구에서 나오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 여자가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가 걷는 동안, 그 남자의 시선도 여자와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는 여자는 곧장 남자 품속에 폭 하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그제야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을 살포시 들어 그 여자를 안았다. 


그 남자의 시선은 말 그대로 '시선고정'이었다. 나라면 기다리는 동안 한 번쯤은 주변을 둘러볼 것 같은데. 어떠한 화려함도, 어떠한 볼거리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에 비길 것이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이내 손을 잡고 타임스스퀘어 쇼핑센터를 뒤로한 채 걸어갔다. 이 사람들 지켜본 것은 5분 남짓이지만, 그들은 내가 홍콩에 머물렀던 4일간의 일정과 현지인들이 살아온 시간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타임스스퀘어 쇼핑센터 ⓒ리지



05

그 뒤로도 비슷한 광경들을 자주 목격했다. 빅토리아 파크(Victoria Park)는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려는 현지인들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밤 아홉 시 무렵, 공원에는 일치감치 저녁을 먹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복잡하다기보다는 여유로웠다. 공원 벤치에는 정장을 입은 젊은 남녀가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퇴근하고 늦은 저녁을 먹는 모양이다. 그들 말고도,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지나간다. 같은 길 위에서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부모들과 노인들도 여유 있게 걸어간다. 공원 중간중간에 위치한 놀이터에도 그네를 타는 아이와 근처 벤치에 앉아있는 엄마, 아빠들이 있다. 네온사인을 살짝 가려주는 가로수와 가로등 불빛 아래로 강아지와 함께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홍콩의 야경에는 관심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실제로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홍콩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옆에 있는 가족, 친구, 반려동물,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더 소중해 보였다.


해가 진 뒤의 빅토리아 파크 ⓒ리지




06

결국, 세상에 그 어떠한 반짝임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반짝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서 한 여자만 바라보던 그 남자의 눈빛. 홍콩의 밤거리가 아무리 별처럼 반짝인다 한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만큼 반짝이는 별이 또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삶의 위로가 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별들이 질투를 한다면 화려한 야경이 아니라 사랑으로 빛나는 사람들 일 것이다. 사랑하는 일, 그것이 홍콩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다. 홍콩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아 보였다.


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특별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그런 특별한 순간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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