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결혼기념 및 Thanksgiving trip
매년 땡스기빙 시즌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과 겹친다.
우리는 말띠 동갑내기 부부. 1980년 11월에 결혼을 했으니 금년이 42년쯤 된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대학교 4학년 말에 이른 결혼을 했다. 장인께서 과년한 당신 따님을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데려가라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그 말씀에 못 이기는 척 일을 벌였다. 졸업을 못해 아직 직장이 없던 나로서는 그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아내를 데려오게 될지 기약이 없었다.
다행히 아내를 맘에 들어하시던 부모님에게 결혼자금으로 얼마를 빌려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정말 돈이 없던 때였는데도 무슨 배짱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때 생각으로는 아직 학생 신분으로 직장이 없던 때라 거창한 결혼식이 아니어도 크게 흠이 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이 생각은 잘 적중했고 나중에 물론 부모님께 빌린 돈도 모두 갚았다.
사회생활 준비가 안되었던 내게 와주겠다는 아내가 그저 고마웠다. 그리고 딸의 결정에 따라준 처가의 허락도 감사할 뿐이었다. 교직에 계셔서 사회적 입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장인께서는, 정말 한심하게 보였을 내게 맏딸을 시집보내는, 정말 무리한 베팅을 하셨고 그 일이 내게는 인생의 큰 기회가 된 셈이다. 결혼식이 열리던 자그마한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시던 장인의 모습이 떠 오른다.
언젠가 우리가 미국에 들어와 살면서 십여 년이 지나 장인어른께서 미국까지 한번 다녀가신 적이 있다. 그때 장인께서 내게 넌지시 한마디를 하셨다. 그때까지 처음 들어본 말씀이었다.
‘이서방, 우리 순임이가 자네를 만난 게 정말 축복임을 내가 이제 분명히 알겠네. 고맙네.‘
나중에 아내에게 이 말씀을 전해주었더니 아내는 자기에게도 친정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 당신에게 했느냐고 놀라워했다. 자신이 내린 결혼 결정을 그제야 인정받는 듯 감격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함께 40해를 훌쩍 넘겼다. 지금까지의 긴 세월 동안 피차 상대방 한 사람의 얼굴만 보고 이렇게 오래 살아내었다는 말이다. 이건 정말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을 다 출가시키고 난 언젠가부터는 땡스기빙 시즌엔 우리 둘만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이미 결혼한 아이들이 땡스기빙 시즌을 우리 때문에 어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의 가족들을 먼저 챙겨 지내드리라는 배려 차원이었다. 우리와는 아무 때라도 상관없으니 아이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었다.
그전엔 결혼기념일을 별로 챙기지 않던 우리 부부도 자연스럽게 이런 여행과 함께 의미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은근히 여행의 의미가 로맨틱해지는 느낌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들에게도 스스로 보상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금년의 여행은 본래 뉴욕의 맨해튼에서 보내려 했았다. 코비드 이후의 북적거림을 며칠간 그곳에서 피부로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내는 번다한 곳보다는 그냥 조용한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여행기분이 드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테네시의 스모키 마운틴과 내쉬빌을 생각하다가 집에서 뉴욕과 비슷한 거리에 있는 뉴저지의 Atlantic City로 가닥을 잡았다. 다행히 아내도 맘에 들어하고 호텔 앞이 바로 보드웍이라 돌아다니기도 손쉬운 데다 바로 앞이 해변이어서 일출도 쉽게 볼 수가 있는 곳이다. 성수기인 여름 시즌이 끝나 큰 호텔의 숙박비가 아주 저렴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오후 네시로 되어있는 Showboat 호텔의 체크인 시간을 맞추느라 버지니아에서부터 하이웨이를 피해 일부러 로컬 도로를 타기로 했다. 마침 구글 맵은 톨 비용이 필요 없는 루트를 찾아주었다. 도착하는 시간도 적절했다.
이번 여행으로 지난 7월에 받은 테슬라 모델 Y 퍼포먼스의 장거리 운행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중간에 어느 정도의 배터리가 소모되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가는 거리가 235 마일 정도이고 밤동안에 배터리의 용량을 95%까지 충전하여 단번에 중간 충전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하면 인근에 슈퍼차저가 몇 군데 있어서 무리 없이 충전이 가능해 보였다.
수요일 아침 집에서 아침 9시경 출발했다. 회사는 땡스기빙 관계로 오전까지만 근무하는 날이다. 먼저 반나절 양해를 구해 시간을 얻어 놓았었다. 길은 어느새 DC 벨트 웨이인 495번에서 95번으로 갈아타고 있었다. 중간에서 맵은 톨을 피해 볼티모어를 우회시키기 위해 695로 데려가더니 어느 사이 메릴랜드의 시골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런 로컬 도로의 제한 속도는 30-50 마일 정도로 달리는 속도가 많이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가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시골 풍경을 보느라 지루한지도 몰랐다.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우리 결혼기념일이 언제인지 알아?’
아내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날짜를 살피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결혼기념일 선물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이런 절기를 잘 지키는 편이 아니다. 그냥 저녁이나 한 끼 같이 하거나 자잘한 여행으로 때우는 편이다. 아내는 그래도 내가 날짜라도 기억하고 있는 게 기특한 표정이다. 둘은 웃으면서 다시 햇수 계산을 하면서 지나온 세월에 새삼 놀라는 표정을 지어본다.
세 시간 좀 넘게 달렸을 무렵 테슬라의 배터리는 30%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면 충전하지 않고도 목적지에 닿겠지만 하이웨이 상에서 쉬기도 할 겸 중간 슈퍼차저에서 충전을 하기로 했다. 뉴저지 턴 파이크에 들어가지 않고 우회하여 찾은 델라웨어 시골의 차징 스테이션에는 자리가 4군데 있는 것으로 테슬라의 스크린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Wawa라는 편의점에 있는 차징 스테이션에는 8대가 충전할 수 있었는데 편의점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겨우 한 자리를 찾아 차를 세워 충전할 수 있었다
30분 소요된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얼핏 보면 충전 시간이 길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은 아니었다. 충전 비용은 $19 정도 나왔다. 사실 톨을 탔다면 $30 정도는 드는데 톨 비용이 안 들었으니 그리 밑지지는 않는 여행이다.
드디어 목적지인 Atlantic City 도착
묵기로 한 Showboat 호텔은 규모가 작지 않았다. 그런데도 철이 지나서인지 그 큰 프런트에는 겨우 창구 하나만 비워놓고 직원 한 명이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이틀 밤 숙박비 겨우 $110. 만약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끼게 되면 값은 두배 이상으로 뛰어오른다. 이번에는 우리 부부의 주말 스케줄 때문에 너무 좋은 가격으로 묵게 된 셈이다. 방은 25층 가운데 19층에 있는 바다가 아주 잘 보이는 것으로 준비해줘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간단히 여장을 풀고 호텔 앞 보드웍으로 나왔다. 깔끔한 보드웍에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연휴에 여행을 다니는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이니 괜찮은 레스토랑이 어디 있겠지 찾다가 아내가 속을 풀만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원해 옆 큰 호텔의 메인 로비에 있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잡았다. 음식의 맛이 가격에 비해서는 우리의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철 지난 계절에 깔끔하게 식사할 수 있는 비교적 괜찮은 레스토랑이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하룻밤을 편히 쉬고 해 뜨는 시각에 맞춰 해변으로 나섰다. 예년과 달리 기온이 따뜻한 편이고 바람도 별로 없어 해변 산책이 좋았다. 마침내 예고된 일출 시간이 되자 수평 선위로 점점 피어오르는 태양을 대할 수 있었다. 나까지 괜히 장엄해지고 숙연해진다. 해변에서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보면서 자연의 어느 한 부분으로 동화해 들어가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Atlantic City의 바다 끝에서 먼 또 다른 한편에는 Edwin B. Forsythe 천연 보호구역이 있다. 이곳은 새들의 처소를 보호하기 위해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개방하지 않는 곳이란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AC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그곳에 닿았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렇게 멋진 해안을 만났다.
끝이 안 보이는 고운 백사장이 길게 이어지고 해안선 저 멀리에는 AC가 아스라하게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말대로 신과 양말을 벗고 물기 먹은 해안선을 따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닿는 약간 차가우면서도 고운 모래의 느낌이 마냥 신기하다.
한국에서는 맨발로 황톳길 걷기가 한참 유행이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그런데 해변 걷는 게 더 좋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정말 체내에 남아있는 나쁜 기운이 다 내려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냥 착각이었을까?
우리 걷는 모습을 보고 옆으로 지나가던 어느 백인 할머니는 너무 차지 않느냐고 용감하다고 깔깔대며 재미있어한다. 어쨌든 우린 그렇게 왕복 5마일을 걸었다. 둘이 걸은 자국을 보니 마치 우리의 지나온 날 같다. 꽤 괜챃아 보였다.
그렇잖아도 언젠가 맨발 걷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 일을 멋지게 해낸 날이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다음 날 아침, 다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올 짐을 꾸렸다. 이번 주 토요일엔 아이들과 함께 집에 모여 미처 못했던 땡스기빙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위해 집을 떠날 때는 설렘으로 너무도 좋지만 또 집으로 돌아갈 때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아주 푸근하게 한다. 더구나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모여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내는 늘 나같이 쌀쌀한 사람이 아이들만 보게 되면 금방 얼굴이 환해진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놀리곤 한다.
간단히 체크아웃을 하고 주차된 차를 출발한다. 돌아오는 길은 톨 로드를 택하기로 했다. 너무 지루하지 않게 편하게 돌아오는 길로 잡았다. 뉴저지 턴 파이크의 마지막 휴게소에서 충전을 하고 곧바로 95번을 탔다. 그리고 충전은 집 가까이 거의 다 도착해 챈틸리에서 $5 정도 한번 더 마지막 충전을 했다.
테슬라를 타게 되면서 나한테 생긴 좋은 점 하나는 안전 운행이다. 전에는 내 앞으로 달리는 차를 잘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넉넉하게 안전거리를 띄어 절대 과속을 안 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안전 점수를 보니 500 마일의 평균 점수가 98점이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드라이빙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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