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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Nov 14. 202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리가 잘 곳이 없다.

파리에서 낭만과 낭패 사이를 넘나들다.

나와 내 고등학교 동창 이슬이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파리 디즈니랜드를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정 비현실이고픈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다.


다음날이면 파리의 이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떠나서 브뤼셀로 향할 것이다. 피곤하지만 여전히 들뜬 얼굴을 하고 5일째 투숙하고 있는 도미토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는 내 침대 위에 낯선 남자가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모든 짐들이 한대모여 바닥에 놓인 채로.


곱슬머리에 눈썹이 짙고 눈이 큰 그 남자는 나에게 본인이 이 침대를 오늘 배정받았다고 말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바닥에 놓인 내 짐들을 그러모으며 불쾌한 얼굴을 숨길수가 없었다. 하아. 또 이 못하는 영어로 어떻게 싸워야 하나. 한창 화가 많은 나이였다.


나는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일단 그곳은 내 침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1층 데스크로 뛰어내려 갔다.


"너희는 둘 다 오늘 밤 예약이 되어있지 않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오늘 이곳에 여분의 침대는 없어."


게스트하우스 직원은 공식적으로 우리의 실수와 곤경과 낭패를 선포했다. 우리의 퇴거를 선포하는 직원도, 내 침대를 차지한(아니, 이제 그의 침대였지만) 곱슬머리의 남자도, 우리에게 힘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파리의 7월은 성수기였고 그날 밤 우리를 품어줄 침대는 그곳에 없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숙소 예약 플랫폼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간편하게 이용 가능한 숙소를 찾아서 예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파리 시내는 게스트하우스 밀집지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무작정 길을 나서서 근처의 숙소를 찾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여행을 계획할 때 숙소를 정하고 예약하는 것은 내 몫의 일이었다. 하룻밤 노숙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한 숙소의 체크아웃 날짜는 다른 숙소의 체크인 날짜와 맞물려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실수로 오늘 파리 숙소에서 체크아웃하고 내일 브뤼셀 숙소로 체크인하도록 예약해놓은 것이다.

도미토리의 작은 창문 밖으로 새까만 어둠이 보였다. 저녁 9시에도 대낮처럼 환하던 파리의 여름, 아마도 시간은 열 시를 넘겼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떡해야 하나. 엊그제 봤던 집시들이 바글바글한 파리의 밤거리로 쫓겨나는 건가..


나는 일단 낭패감을 표현하고 자책을 하는데 몇 분의 시간을 썼다. 아마 이슬이가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한마디 하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을 좌절하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이슬이는 이틀 전 파리 시내투어를 한나절 동안 해주었던 가이드의 명함을 꺼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줄처럼 보였다.

'제발, 제발'을 속으로 외치며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었고 천사와도 같은 그분이 수소문 끝에 한인숙소 한 곳을 연결해 주었다.


그곳도 역시 풀 부킹이어서 침대는 없었다. 숙소 사장님이 공용 거실 소파를 붙여서 간신이 우리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래도 그런 것은 정말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낯선 나라의 처음 와보는 도시에서 드디어 안전하게 잘 수 있는 곳이 마련되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정상가보다 적은 금액을 받고서도 그 숙소 사장님은 우리에게 미안한 듯 맥주 한 캔을 내밀었다. 그리고 숙소 현관키를 우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숙소에서 에펠탑이 가까우니까 지금 가면 자정에 특별히 더 반짝이는 에펠탑의 조명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낭패감과 좌절을 반전시키는 에펠탑의 조명쇼를 봤다고 하면 좋았겠으나...


우리는 디즈니랜드에서 1차 체력소모, 갑자기 숙소가 사라진 것에 2차 멘탈소모를 겪으며 에펠탑 조명쇼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숙소 사장님이 쥐어주고 간 도수 높은 맥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숙소를 예약할 때 다시는 날짜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그러한 큰 교훈을 얻고서 그 뒤로는 여행을 계획할 때 항상 날짜와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예약 버튼을 눌렀다. 역시 사람은 한번 호되게 당하면 교정이 쉽다.


그건 그렇고 그 침대를 나 다음으로 배정받은 그 녀석. 꽤 착했던 것 같다. 정리도 안된 침대에서 조용히 널브러진 짐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짐 주인을 기다리던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걔도 꽤나 불안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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