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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Nov 04. 2020

시드니 공중전화부스 속의 오래된 거짓말

호주 가족여행


와 나는 정말 호주에서 먹었던 소고기를 잊을 수가 없어~ 너무 맛있었어!!

아빠는 소고기를 먹을 때면 어김없이 호주 여행 이야기를 꺼낸다. 4년 전 가족끼리 다녀왔던 호주 여행에서 육즙 가득한 소고기를 먹었던 것이 아빠에게는 가장 강렬했던 기억인 것이다.


아빠의 호주 소 찬양에 이어, 엄마는 골드코스트의 끝없는 해변에 대해 언니는 첫 숙소의 야경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인다. 그러나 우리의 호주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풍경이나 음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은 레드펀에서 봤던 애잔한 아빠의 얼굴, 눈시울이 붉어진 아빠의 얼굴이었다.


내가 가족들과 함께 호주 여행을 떠나기도 한참 전인 2007년도에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시드니에 갔다. 그해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그것은 나의 첫 외국 방문이었는데, 처음 치고는 길게 열두 달을 호주에서 보냈다.


내가 시드니에 머물렀던 초반에 나는 베드벅스에 물려서 온몸이 뒤집어졌던 적이 있었다. 빨갛게 물린 자국들이 얼굴까지 올라왔다. 나는 두려워서 울었고, 친절했던 홈스테이 아저씨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 주었다. 그래도 나는 멀리 한국에 있는 나의 오랜 보호자에게 전화를 걸어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을 전했다.


엄마 으앙 나 벼룩에 물려서 괴로워


그때부터 엄마는 내가 전화만 하면 내 피부에 대해 걱정을 했다. 함께 살던 영국 친구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했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에게 말했다.


오 그걸 엄마한테 말했어? 그럼 당연히 엄마가 걱정하시지!


그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어리고 철없는 짓을 했구나.. 어리고 철없는 나이었으면서도 그것이 부끄럽고 후회가 됐다. 그리고 웬만하면 나쁜 일은 엄마한테 전달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몇 개월이 흐르고 나는 시드니에서 돈을 벌며 생활비와 여행경비를 모았다. 마음이 맞는 유럽 친구들이 생겨서 이층 집을 렌트했고, 때문에 생활비가 적게 들었다. 지은 지 100년이 넘는 그 집은 호주 개척시대에 지어졌던 전형적인 이층 집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레고 블록을 줄지어 붙여 놓은 듯 집들이 빈틈없이 어깨를 맞대고 있고 이층에는 테라스가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방하나와 거실이 있고 안쪽에 부엌과 다이닝룸이 있는데, 그곳을 지나면 작은 뒷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그 뒷마당에 야외화장실이 있다는데 그 집에 함께 살았던 그 누구도 그곳을 확인하거나 청소를 하지 못했다. 그 어떤 치밀한 닌자로 소리 없이 오를 수 없는 요란한 계단을 오르면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세 개와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층 중앙에 있는 방에서 살았다. 작은 창문으로 자주 옆집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렴하다는 장점과 함께 많은 단점들을 가진 그 집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요리를 하고 파티를 하고 잠을 자고 함께 꿈을 꿨다.


그 집의 많은 단점들 중에 가장 큰 단점은 그곳이 위험한 것으로 악명 높은 레드펀이라는 것이었다. 호주 원주민들은 왜인지 알 것 같은 이유로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레드펀에는 그들이 많이 살았고, 몇 년 전에는 역 바로 앞에 있는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는 얘기도 있었다. 역에서 내려 경찰서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은 고작 5분이지만 늘 안전과는 거리가 먼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Redfern의 아파트들

레드펀에서 살 때 나는 한동안 쓰리잡을 했었다. 낮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나는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자전거를 샀고 시드니 시내를 관통해서 매일 출근을 했다. 파란색 헬멧을 머리에 쓰면 늘 앞머리가 눌려서 머리 모양이 망가졌다.


어느 날 옷을 갈아입다 보니 오른쪽 가슴 밑에 좁쌀 같은 수포들이 올라와있었다. 아프거나 간지럽지 않아서 며칠을 방치해두었다. 그러는 동안 수포들은 영역을 넓혔고 등에도 몸의 오른편에 같은 수포들이 올라왔다. 나는 한인들 모여사는 동네에 있는 한인의사를 찾아갔다. 여자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요즘 스트레스받거나 피곤한 일이 많았느냐 물었다.


아니요. 별로 스트레스받는 일 없는데요?


머리로 받지 않은 스트레스를 나는 온몸으로 받고 있었나 보다. 나는 면역력이 떨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주 걸린다는 대상포진에 걸렸다. 돈 없고 가난한 유학생을 위해 한인의사 선생님은 이런저런 약들을 골라서 나에게 챙겨주셨다. 임상실험 중인 약들을 받아서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집에서 만난 독일 친구 크리스가 걱정되는 얼굴로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고맙다고, 그러나 전염병에 걸렸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필 왜 전염성이 있는 병일까. 그러나 사랑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다 아주 멀리에 있었다.


앞으로 며칠간은 일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을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다. 피부를 작은 바늘들로 쿡쿡 쑤시는 듯한 고통은 밤에 더 심했다.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그래도 잠 못 들어 괴로운 밤들이었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픈데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말했다. 나는 항상 호주 원주민이 불을 질렀다는 경찰서 옆 공중전화를 사용했다. 대부분 씩씩한 목소리였지만 가끔은 결국 울었다.

새로 설치된 듯한 공중전화. 이곳에 내가 늘 애용하던 공중전화부스가 있었다.

그런 날들이 벌써 9년이 지나고 늘 전화나 편지를 통해서만 설명했던 시드니의 모습을 가족들과 함께 봤다. 시드니 여행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내가 살았던 레드펀 집에 혼자 다녀오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언니는 자고 있었고 아빠와 엄마가 따라가겠다고 해서 셋이 센트럴에 있는 숙소를 나섰다.


나는 일을 하다가 지하철이나 버스가 끊기면 가끔 여기를 혼자 걸었어. 멍청한 생각이었지. 이렇게 위험한 길을 왜 걸어갈 생각을 했을까?


센트럴에서 레드펀까지는 걸어서 20분이 걸렸다. 낮에도 인적이 드물고 허름한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함께 살던 스웨덴 친구는 밤에 강도를 만나서 지갑을 빼앗기기도 했던 그 길을 왜 나는 혼자 걸었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아빠는 웃지 못했다. 아빠는 콧등이 시큰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아픔을 숨긴 것, 언니랑 만기 적금을 털어 가족들과 함께 호주에 다시 돌아온 것, 건강하게 살아서 대수롭지 않게 무식했던 경험을 늘어놓는 것, 이 모든 것들 다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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